Heartbeat
- 야, 너 심장 뛰는 소리 들어 봤어?
- 그 소리가 들려? 소머즈도 아니고.
- 소머즈가 뭔데?
- 맨날 농구만 하지 말고 문화생활도 좀 해라.
근데 그거 계속 들리면 불편해서 어떻게 살아?
한국은 좁은 사회다. 서너 다리 건너면 전국민이 다 아는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구밀도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좁은 곳에서 운동이라도 하면 더 실감하게 된다. 서너 다리는 무슨, 한 다리만 건너도 안다. 아, 모 중학의 걔? 어릴 때 옆 동네에서 운동했어. 걔 나도 알아. 유소년 클럽에 있을 때 상대 팀으로 만난 적 있어. 그중에서도 특히, 유별나게 잘하는 놈은 이름만으로도 아하, 하고 손바닥에 주먹을 치게 만든다.
그게 최동오였다.
쟤지? 어어. 작지 않은 회장의 시선 대부분이 한 얼굴에 꽂혀 있다. 정성구의 시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작 당사자는 태연한 얼굴이었지만. 으, 쟤는 부담스럽지도 않나? 중학교에 들어가서 참가한 전국농구선수권대회에서 소문 자자한 그 얼굴을 처음 봤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네. 딱 서울깍쟁이처럼 생긴 얼굴. 일학년은 대부분 벤치에서 의자나 달구는 역할인데 쟤는 주전 엔트리에서 펄펄 날았다. 툭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뼈대를 하고 몸싸움도 제법 했다. 저런 놈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정성구네 학교는 그날 대패했고 그 경기의 MVP는 누가 봐도 이제 막 입학한 일학년생 에이스였다. 정성구는 한동안 침대에 눕기만 하면 최동오 앞에 자기를 세워 봤다.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고 돌려 봤지만 백전백패였다.
자존심이 상한 것도 잠시였다. 지역도 다른 동갑내기 에이스는 머릿속에서 금방 희미해졌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이나 전국대회에서 만날까 말까인데, 어째 첫해 말고는 최동오가 소속된 학교랑 만날 일이 없었다. 매번 4강에 남은 걔네 학교 이름을 볼 때마다 생각나긴 했는데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건 중학교 삼학년, 졸업을 앞두고서였다.
정성구는 중학교 이학년 즈음에는 일반적인 훈련을 거의 소화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해에 바지만 세 번을 사야 할 정도로 키가 쑥쑥 컸다. 친구들과 몰려 앉아 밥을 먹고 있으면 지나가던 선생님들이 꼭 한 마디씩 얹고 갔다. 많이 먹어라. 너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속 편한 응원들과 달리 당사자인 정성구는 죽을 맛이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끙끙대느라 눈 밑에 다크서클이 선연했다. 그래도 코트에 들어서면 아픈 것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있는 힘껏 뛰어올라야 겨우 닿던 곳에 가벼운 점프만으로 손을 댈 수 있는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을 아는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시야 덕에 조금 더 넓게 코트를 볼 수 있네, 깨달았을 때의 기분은? 아드레날린이 과하게 도는지 고통도 잊고 정신없이 뛰다 보면 기겁한 코치에게 반쯤 끌려나가야 했다. 너 올해만 농구하고 그만할 거야? 그때쯤 정성구는 결심했다. 평생 해야지. 농구. 성구야, 농구 계속할 거야? 3학년이 되자 조심스럽게 묻는 어머니의 말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것도 그래서였다. 스카우트가 들어온 건 그때쯤이었다.
“강원도라고요?”
학교로 불려온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젊은 감독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턱을 문지르면서 웃었다. 언제든지 오셔서 성구 만나 보실 수 있고요. 공기도 좋고 운동에 집중하기에 괜찮은 환경입니다. 학교 이름도 있고, 성적도 좋습니다. 쌓인 훈련 노하우도 있고요. 재능 있는 아이들을 매해 전국에서 스카우트하고 있습니다. 여러 지역에서들 옵니다.
정성구, 면담. 내일 부모님 모셔 와라. 산왕공업고등학교다. 어디라고요? 귀를 의심한 정성구 곁에서 축하가 쏟아졌다. 산왕공업. 난다 긴다 하는 놈들만 모인다는 고교 농구의 제왕. 전국대회 우승을 그야말로 밥 먹듯이 했고, 스카우터들도 틈만 나면 찾아온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거기가 그렇게 유명하니? 농구 하는 애들한테 산왕 하면 모르는 애 아무도 없어요. 저녁 식사에서 이야기를 전하자 어머니는 영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누구누구 있어요? 어쨌든 삼 년간 한 공간에서 같이 굴러야 하는 거였고, 전국에서 모인다니 어린 마음에 호승심도 들었다. 나열되는 이름 중에는 어디서 한 번쯤은 들어 봤던 이름들이 제법 포진해 있었다. 와, 장난 아니네. 아, 그렇지. 최동오. 걔도 고민 중이다. 고민 중이라고? 산왕을? 하긴, 서울에서 강원도로 가는 거면 그럴 법도 했다. 당장 정성구 부모님도 어젯밤 거실에서 조금 언쟁을 하셨으니까. 아니, 나는 운동 그거 적당히 하다 말 줄 알았지. 농구로 제일 유명한 학교에서 스카우트 왔다면서? 애를 어떻게 거기까지 혼자 보내. 어머니의 한숨과는 반대로 아버지는 신이 난 기색을 감추지 못하셨다. 당신은 쟤 키를 보고도 아직 애 같아? 나중에 우승 반지랑 꽃다발 받을 생각이나 하자고. 하이고, 김칫국 마시다 체하지. 한참을 걱정하시던 어머니는 다음 날 아침에 퀭한 눈을 하고도 웃으셨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갈래요.
걔도 오면 좋을 텐데. 정성구는 침대에 누워 오랜만에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다. 기억 속의 최동오는 여전히 일학년 때의 그 모습이었다. 얼굴은 잘 기억이 안 났다. 욕 나오게 잘생겼던 것 같은데. 음, 아직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어쨌든 농구는 일단 키가 크면,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갔다. 어리면 어릴수록 더 그랬고. 그러니까 이번엔 좀 비벼볼 수 있지 않을까?
한 판 붙어 볼 기회는 생각보다 늦게 찾아왔다. 드넓은 논과 밭, 그리고 허허벌판에 서 있는 학교 건물들을 보면서 후회한 것도 잠시 가벼운 자기소개 후에는 서로 대화를 할 틈도 없이 체육관을 굴러야 했다. 여기도 빡빡이, 저기도 빡빡이라 어디 있는지 찾기도 어려웠을뿐더러 최동오 생각을 떠올릴 시간도 모자랐다. 뭐 친목 도모를 하려고 해도 체력과 정신력과 시간이 남아야 하지. 남는 시간? 그런 건 없었다. 먹고 씻고 기절 잠을 자기에도 모자랐다. 같은 방에서 자는 몇 명만 겨우 통성명을 하고 이름을 외웠다. 그나마도 비슷비슷한 빡빡이들이라 얼굴과 이름을 매치하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옥 같은 기초 훈련에 그럭저럭 익숙해져 갈 때쯤엔 전국대회를 대비한 합숙 훈련에 들어갔다. 어차피 매일 합숙인데 뭘 굳이 더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훈련을 또 하냐. 여기저기서 한숨이 푹푹 쏟아졌다.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매달 필요도 없이 다리가 무거웠다.
“성구, 튈래용?”
니네 여기서 뭐해? 입에서 매일같이 단내가 나는 상황에도 싹수가 남다른 놈들은 어쨌든 티가 났다. 이명헌 같은 놈들이 그랬다. 좀 이상한 말투를 쓰고 사차원 같았지만 코트 안에만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 됐다. 그런데 그 싹수가 남다른 놈이 왜 덩치를 구기고 구석에 숨어 있냐고. 건물 뒤편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동기들을 발견한 정성구는 눈을 맹하니 떴다. 안 들어가? 쉿- 좀 조용히 해봐용. 신현철은 끌려온 것 같은-골치가 아프다는- 얼굴이었지만 이상한 놈 옆에 멀쩡한 놈이 있을 리가. 쟤도 좀 정상은 아니지. 정성구는 다른 애들에게 자기도 그 이상한 놈들과 도매금으로 같이 묶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근데, 방금 뭐라고?
“미쳤어?”
“이러다 대회 뛰기도 전에 죽겠어용.”
그건 맞는 말이지. 지금도 등짝 한 대 맞으면 그대로 토할 것 같은데 아직 저녁 훈련이 남았다니 말도 안 됐다. 요 밑에 내려가면 햄버거 가게가 있어용. 그건 또 언제 봤는데? 버스 타고 올 때 봤지용. 훈련 튀고 그거 먹으러 간다고? 안 갈 거예용? ...갈래.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죽는 건 똑같으니 마지막 만찬이라도 즐기고 죽자. 몸이 한계까지 구르니 생각이 이상한 쪽으로 튀었다.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삑삑.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리는 것 같았지만 정성구는 무시했다. 먹고 죽은 놈이 때깔도 좋댔어. 오늘 저녁에 죽더라도 나는 햄버거를 먹겠다.
이미 첫 경기부터 벤치에 앉을 것이 확정적인, 언제 주장을 넘겨받느냐가 문제일 것이라는 놈 하나, 골 밑 2년은 거뜬히 해 먹을 것 같다는 놈 하나, 저거 키는 작아도 짱돌같이 단단하고 근성도 끝내줘서 일내겠다는 놈 하나까지. 신입생 요주의 인물 중 셋은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을 넘었다.
햄버거는 프랜차이즈가 아닌 가정식 수제 버거였다. 뻑뻑한 공장형 햄버거 번에 양상추, 치즈, 토마토와 함께 패티보다는 떡갈비에 가까운 두툼한 고기가 들어 있었다. 그래도 내내 닭가슴살에 스포츠음료만 달고 살던 고등학생들에게는 행복한 만찬이었다. 덩치들을 보고 아예 오렌지 주스를 통으로 올려 둔 주인 노부부는 이것도 먹으라며 과일을 가져다주셨다. 버거를 네 개씩 해치우고 반질반질한 사과 한 알씩을 든 탈주자들은 그제야 허리를 펴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속세의 맛이 끝내줬다. 아, 지금 당장 감독님께 끌려가도 좋아. 배가 부르니 뒤늦게 생각이 제 경로를 찾아갔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왼쪽에 이명헌, 앞에는 신현철. 김낙수는 저 지옥도에서 얼굴색 하나 안 변하는 독종이고. 어라, 최동오는? 걔가 훈련을 튀겠나용. 그건 그렇다.
산왕에 와서 보니 최동오는 재능을 타고난 주제에 성실하기까지 했다. 아침에 구보하러 나가면 잘생긴 빡빡이가 이미 나와 있었고, 훈련이 끝나고 샤워실에서 나오면 그제야 라커룸에 땀에 절은 빡빡이가 들어왔다. 서울 최동오, 쟤지? 걔 맞지? 자기소개 시간에 웅성대던 일학년들은 얼마 안 되어 유명인사를 선망의 눈빛보다는 질린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쟤는 언제 쉬어?
같은 학년끼리 진행한 첫 연습게임에서 정성구는 탈탈 털렸다. 하 씨 자존심 상하게. 그날부터 정성구는 이를 악물고 훈련을 했다. 처음으로 최동오보다 먼저 아침 구보에 나온 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색하게 인사하면서 일찍 나왔네, 했을 땐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미남은 어색하게 웃어도 끝내주게 잘생겼구나. 좋겠다. 그날 거울 앞에서 웃는 걸 연습하던 정성구는 인정해야 했다. 최동오 이길 만한 건 그나마 농구밖에 없다는 거. 열의가 활활 타올랐다. 내가 쟤 슛 한 번은 블로킹하고 졸업한다. 방금 일대일에서 거하게 털려 놓고선 엄숙하게 선언하는 정성구의 말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최동오가 킥킥 웃었다. 웃겨? 지금 웃겨? 그러다 보니 어느새 최동오랑 붙어 다니는 사이가 됐다.
“와, 죽겠다...”
“그러게 왜 튀고 그래.”
쟤네는 무슨 돌하르방쯤 되냐? 아니지, 돌은 스트레칭을 못 하지... 벽에 기대서 숨을 헐떡이다가도 근육 뭉친다며 스트레칭을 시작한 둘을 보면서 정성구는 혀를 내둘렀다. 햄버거집에서 배 채우고 돌아온 셋은 탈주자 전용 훈련 메뉴를 소화해야 했다. 도망가는 놈이 한두 놈이 아닌지라 코치진도 딱히 놀라지 않았고 잡으러 가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 산골짜기에서 어딜 가겠나. 잘 놀고 왔니? 왔으면 이제 해야 할 일을 하자. 정성구는 데굴데굴 구르면서 부모님 생각을 했다. 엄마, 좀 적극적으로 말려 주지 그랬어.
“너도 스트레칭 해. 좀 풀어 놔야 내일 또 훈련하지.”
바닥에 늘어진 정성구를 한심하다는 것처럼 보고 있지만 햄버거 얘기를 했을 때 최동오 눈이 빛난 걸 분명히 봤다. 부러웠나 보지? 몇 개나 먹었냐, 할 때는 좀... 입술이 튀어나온 것 같기도 했고. 아, 혹시 지한테 말도 안 하고 가서 삐졌나? 정성구는 금방 고개를 흔들어 엄한 생각을 날려 보냈다. 얘가 또 경로를 이탈하려고 하네. 정신 차려라, 정성구. 자기 빼놓고 갔다고 앵돌아지는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응, 틀렸다. 이번엔 맞게 갔다. 왜 내비게이션은 틀린 길은 삑삑대면서 맞는 길은 너 잘 가고 있다고 말해 주지 않는 걸까? 최동오는 의외로 잘 토라졌다. 거대한 농구부 남학생을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나보다는 작으니까(내가 이 얘기했다는 거 최동오한테는 비밀로 해 줘라). 일 년을 같이 지내봤더니 뭔 놈의 머릿속에 그렇게 생각이 많은지. 이제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저거 또 어디가 틀어졌구만. 그런 것 치고는 금방 풀렸다. 한번 마음에 담으면 평생 우려먹을 것 같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전날 연습경기에서 몸싸움하다가 삐끗한 적이 있었는데, 다음 날에 부딪혔던 걔랑 나란히 석식을 먹으러 가던 놈이다. 근데 나한텐 왜 그렇게 유치하게 굴지? 하여간 안 싸운 날이 드물었다. 그러면서도 내내 둘이 붙어 다녔으니, 이명헌이 이상한 가락을 붙여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같은 노래를 불러도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열 받게는 하는데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진 않단 말이야. 신기한 놈이었다.
*
성구. 안 들린다. 가 봐용. 안 들린다. 주장 명령이에용. 너 아직 주장 아니잖아. 예비 주장 명령이에용. 이명헌은 여름 인터하이 후에 바로 주장 감투를 쓸 예정이었다. 실은 이미 반쯤은 주장 취급이었다. 마지막 인터하이를 앞둔 주장은 이명헌을 제 새끼처럼 끼고 다녔다. 부주장은 뭐 현철이 같은 놈이 하지 않겠어? 최동오 저건 감투 쓸 성격은 아니고. 마음을 놓고 있던 정성구는 내년엔 네가 부주장이다, 라는 말에 입을 딱 벌렸었다. 부주장 얘기를 듣고 난 이후라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웠다. 귀를 막고 나는 안 들린다를 연발하던 정성구가 체육관을 나서는 등을 보고 미적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진짜 내가 가? 간절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돌아봤지만 구해줄 놈 하나가 없었다. 내가 가서 무슨 말을 하는데... 그래도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나.
엘리트들이라고 늘 운동이 잘 풀리진 않는다. 심지어 그 이명헌도 나름대로 슬럼프를 겪었다. 어차피 산왕에 올 정도의 놈들은 스스로 그걸 극복할 정신력쯤은 탑재한 상태였고, 훌륭한 코치진의 사랑을 받다 보면 슬럼프가 아이고 독하고 징그러운 놈, 하고 알아서 떠나가곤 했다. 그래도 그런 시기에 주변에서 신경을 안 쓸 수는 없는 법이다. 혈기 왕성한 나이라 작은 일에도 시비가 붙어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어 저거 이상하다 싶으면 최대한 안 건드리는 게 암묵적인 룰이기도 했다. 일단 대입이라는 1차 관문도 있고, 예민한 놈 건드렸다 두 배로 얻어맞고 징계까지 먹긴 싫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 등짝으로 나 지금 농구 안 돼서 기분 X같다고 외치는 최동오 뒤꽁무니를 쫓아가고 있냐고? 아니... 친구가 밥을 남겼다잖아.
“심각하다용.”
“왜, 최동오 얘기야?”
스트레칭을 하는 정성구 옆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와 앉은 이명헌이 소곤소곤 말을 걸었다. 저거 요즘 영 안 풀리나 보다. 신현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한 게 보름 전쯤의 일이었다. 좀 오래 가는 것 같긴 한데, 어차피 저건 주변에서 뭐라고 한다고 해결되는 종류는 아니니까 다들 지켜보기만 하는 중이었다.
“동오가 밥을 남겼다용.”
“...뭘 남겨?”
근처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신현철의 움직임이 뚝 멎었다. 밥을 남겨? 김낙수가 다리를 뻗으면서 이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명헌이 식판 다섯 번째 채우려다 찬모님께 한 소리 들었다, 이 정도는 뉴스가 안 된다. 최동오가 첫 식판에 새 모이만큼 담아 놓고 그마저도 남겼다, 이래야 좀 뒤집어지는 거지. 어쨌든 운동부 남학생들에게는 굉장히 큰일이었다. 밥을? 밥을 남겨? 그럴 수가 있나. 근처로 이학년 몇이 모여들어 말을 얹었다. 쟤 어제 석식도 남겼어. 야식 모임에 안 나온 지 한참 됐지? 저거 저대로 둬도 되냐? 말도 못 걸겠다 요즘. 너도 지난번에 저 상태였어 이 새끼야. 소곤소곤 떠드는 무리에는 시선도 안 준 채로 저쪽에서 최동오가 체육관 문을 밀고 나섰다. 평소 같으면 무슨 얘기 하느냐며 은근슬쩍 와서 낄 텐데, 예민해지니 앞도 뒤도 옆도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문을 나서는 최동오에게 꽂혔던 시선이 동시에 정성구에게 돌아왔다.
“너는 뭐 들은 거 없어?”
“쟤가 그런 거 말할 놈이냐.”
“그래도, 네가 절친이잖아.”
그런가? 의외로 둘은 코드가 잘 맞았다. 농담이라고는 모를 것 같이 생긴 정석 미남은 제법 웃긴 말-본인 기준에서-도 할 줄 알았고, 가끔은 그 나이 또래처럼 유치한 짓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을 타는 건 타고난 성정인지 최동오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최동오가 다른 사람을 배척하거나 밀어낸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이 긋는 선은 확실하게 보이는 법이니까. 정성구는 그 선 안에 들어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사실 같이 다니는 무리를 살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이명헌이랑 김낙수는 마이웨이, 신현철은 농구부 외에도 다른 친구가 많고, 그럼 둘이 남는다. 그만큼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주변에서는 그런 둘을 신기하게 봤다. 최동오랑 있으면 좀 눈치 보게 되지 않냐? 그래? 걔 의외로 단순한데.
아직 훈련이 남아 있으니 멀리는 안 갔을 거고, 청승맞게 어디 체육관 뒤나 아니면 나무에 등을 기대고 똥폼이나 잡고 있겠지. 역시나였다. 꼭 자기 같은 곧은 나무 옆에서 허리에 손 얹고 허공만 죽어라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냥 가서 말 걸기는 뻘쭘한데. 정성구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내 기억엔 이 근처에... 찾았다. 자판기 앞에서 저지 주머니를 뒤지자 동전 몇 개가 굴러 나왔다. 피 같은 내 용돈.
아잇, 뭔데? 차가운 음료수를 대뜸 볼에 가져다 대자 최동오가 펄쩍 뛰었다. 음, 가까이서 보니까 얼굴이 상하긴 했다. 그러게 왜 밥을 안 먹냐고. 정성구는 음료수를 억지로 쥐여 주고 허전해진 손으로 뒷머리를 문질렀다. 이명헌이 진지해지면 그런 얘기 잘하던데. 사람 막 후벼파고 억지로 심해에서 멱살 쥐고 끌어 올리는 말 같은 거. 투박하지만 좋은 얘기해 주는 건 신현철이고. 아, 그러게 왜 날 보내. 현실적인 조언도, 예쁘게 꾸민 말도, 다정하게 위로하는 법 따위도 알지 못하는 정성구가 할 수 있을 만한 건 그냥 등만 퍽퍽 두들겨 주는 것뿐이었다. 기운 좀 내. 최동오는 얼굴을 뻣뻣하게 굳혔다. 한 소리 할 거면 빨리하고 꺼지라는 방어적인 표정이었다.
“배 안 고파?”
“...어?”
“밥 남겼다면서.”
“대표로 한 소리 하려고 온 줄 알았는데.”
“너 밥 남겼다고 해서 왔지.”
이명헌이 보낸 거 아냐?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는 최동오에게 두 손바닥을 내보였다. 나 결백하다. 이런 데서는 눈치가 참 빨랐다. 결과적으로 정성구를 보낸 친구들의 선택은 옳았다. 음료수를 세 모금 만에 해치운 최동오가 슛 모션을 취하면서 빈 캔을 던졌다. 노골. 허탈하게 웃은 최동오 대신 정성구가 캔을 쓰레기통에 주워 넣었다.
“왜 이렇게 안 되지?”
“천재란 놈들은. 원래 잘 안 되는 거야.”
“자랑이다.”
“가자, 올해는 벤치 앉아야지.”
“당연한 거 아니냐? 너나 잘해.”
대화 말미에서야 겨우 희미하게 웃어 보인 최동오는 그달을 넘기기 전에 번호가 새겨진 유니폼을 받았다. 정성구는 손바닥이 터지도록 박수를 치면서 웃는 얼굴이 훨씬 낫다는-어떤 얼굴보다?- 생각을 했다.
*
우리를 향한 것이 아닌 환호성과 응원들. 승리한 자를 축하하는 소리를 뒤에 두고 떠나는 기분. 중학교 때까지 그렇게 많이 지고 살았으면서 산왕에 왔다고 그새 그걸 잊어버렸던 모양이다. 누구보다 앞서 코트를 벗어나고 수건을 뒤집어쓴 채 걸어가는 최동오 뒷모습을 신경 쓸 정신도 없었다. 그냥 관성적으로 옷을 갈아입고, 눈이 벌게진 후배들을 토닥여 버스에 태우고. 멍한 채로 지내다 보니 어느새 강원도로 돌아온 상태였다. 고생했고, 한동안 좀 쉬자. 공식적으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 와중에도 농구에 미친 놈들-정우성, 정우성, 정우성 같은 놈들-은 체육관에 나가는 것 같긴 했지만.
최동오와 대화를 나눌 기회는 별로 없었다. 다들 각자의 방식대로 패배를 극복하느라 다른 사람 신경 쓸 정신도 없었고. 최동오가 생각난 건 훈련 재개 이틀 전쯤이었다. 애들 요즘 뭐 해? 방에 틀어박혀 있던 정성구와 다르게 신현철은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녀서 은근슬쩍 근황을 물었다. 말이 애들이지 최동오가 궁금했다. 글쎄? 몇 번 못 봤는데. 밥 먹을 때나 봤지.
심란하니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원래대로라면 일어나서 아침 구보 나갈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훈련은 내일부터지만 어차피 드러누워 있어 봐야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아서 대강 옷을 주워 입고 방을 나왔다. 마음이 복잡할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였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쐬면서 체육관 가는 발걸음이 의외로 가벼웠다. 손에 와 붙는 가죽의 느낌도 그리웠고. 아, 농구하고 싶다. 한 걸음씩 걷는데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소리가 났다. 쿵, 그리고 또 조금 있다가 쿵. 문 가까이에 갈수록 소리는 더 분명해졌다. 누가 이 시간부터 연습 중인 모양이었다. 와, 세상에 최동오 같은 놈이 또 있었다니. 근데 또 있는 게 아니라 그놈이 그놈이었다. 머리를 다시 깎았는지 뒤통수가 유달리 동그랬다.
“...너 새벽부터 뭐 해?”
말을 걸지 말았어야 했나.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입에서 튀어 나간 뒤였다. 아- 모른 척해 줄걸. 저 자존심 센 놈이 무슨 심정으로 체육관에 나와 있는지 뻔했다. 근데 돌아보는 얼굴은 예상외였다. 그냥, 일찍 깨서. 수건을 뒤집어쓰고 건드리지 마, 온몸으로 외치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평소의 최동오 쪽에 더 가까웠다. 그래서 정성구는 얼빠진 얼굴로 생각한 말을 뱉어냈다. 너 괜찮아? 뒤늦게 헙, 입을 막아 봐야 버스는 진작 떠난 상태였다. 이놈의 뇌랑 입이 고속도로였다. 보는 눈만 아니었다면 제 입술을 주먹으로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작 최동오는 태연한 얼굴인데도.
“한두 번 져 봐?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최동오는 얼마 전의 패배가 다시 떠올랐는지 진짜 열 받아 미치겠다는 얼굴을 했지만, 금방 다시 등을 돌려 연습을 시작했다. 뛰어오르는 자세와 쭉 뻗은 팔의 각도가 평소와 완전히 같았다. 쿵, 쿵, 림을 통과한 농구공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익숙한 소리를 냈다. 이른 아침이라 더 크게 울리는 것 같았다. 아니, 농구공 소리 맞나? 정성구는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쿵, 쿵, 이거 뭐지? 야, 안 갈 거면 패스 좀 해 줘. 어어... 벽까지 굴러간 공을 주우러 뛰어가면서도 계속 소리가 났다. 쿵. 쿵. 뒷목이 화끈거리고 목이 말랐다. 이게 뭔데?
*
충격적인 전국대회 탈락 이후에도 농구부의 일상은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간단한 훈련과 개인 연습을 하고, 삼학년의 경우에는 사이사이에 입시 상담을 했다. 한 경기 졌다고 살던 세상이 뒤집히진 않을 거라는 감독님의 말씀이 맞았다. 그렇지만 정성구가 살던 세상은 좀 많이 달라졌다. 아무래도 어딘가 고장 난 게 분명했다. 병원에 가 봐야 하나? 인간 심장이 이렇게 크게 뛰어도 돼? 그, 그 뭐야, 소머즈랬나? 이명헌에게 상담했더니 성구 사이보그가 된 거다뿅! 하고 눈을 반짝이는 통에 소득도 없이 도망쳐야 했다. 또라이 새끼...
“야, 뭐 해? 이명헌이 너 찾던데.”
“어어. 가.”
또다. 최동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하다. 저 새끼만 가까이 오면 더 쿵쿵댄단 말이야. 머릿속에서야 수십 번을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었지만 현실에서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쟤는 목도 긴 게, 한 손으로 쥐어도 잡힐 것 같단 말이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설령 당사자에게 묻는다 한들 뭐라고 묻겠는가. 너만 가까이 오면 심장이 뛰어. ...웩. 미친놈 취급이나 안 받으면 다행이었다.
라커룸까지 성구를 찾으러 온 동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 어디다 정신 빼놓고 있는 것 같은데. 전국대회 이후 나사 하나쯤 빠진 채 돌아다니는 놈들이 한두 명이 아니긴 했다. 그렇지만 이 년간 최동오가 봐 온 정성구는 한 경기 졌다고 땅 파는 섬세한 성격이 아니었다. 초짜인 빨강머리한테 밀려서 벤치 신세를 진 게 자존심이 상했나? 저거 단순해서 그럴 놈도 아닌데. 최동오는 정성구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고뇌를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올려 웬수 같은 친구의 어깨를 툭 쳤다. 이거 눈동자가 또 흐리멍덩한 게, 딴생각 중인 것 같았다.. 야, 가자니까. 요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어... 어, 아니, 아니.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핀잔 섞인 한 마디를 뱉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등을 보면서 정성구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그 농구공 소린지 뭔지 쿵쿵대는 소리가 났던 그때 이후로 저 새끼 얼굴만 보면 귓가에서까지 진동이 울렸다. 쿵, 쿵. 원래 사람 심장 뛰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리나? 목에서 쓴물이 역류할 정도로 뛰어 본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쟤는 남자잖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수도 있나?
정성구도 그 나이대의 남자라 애들끼리 그렇고 그런 얘기를 할 때 들은 풍문이 있었다. 그런 얘기에서는 보통 끝내주는 몸매의 누나들이 등장했지 백팔십 센티미터가 넘고 떡 벌어진 어깨를 한 땀 냄새 나는 남학생은 등장하지 않았다. 알음알음 돌려 보던 도색잡지에서도 남자라곤 근육질의 등빨 있는 형님들밖에는 안 나왔다. 굳이 콕 집어 말하자면 최동오 같은 놈을 가지고 그런 상상을 할 여지조차 없었다는 얘기다. 정성구는 왼쪽 가슴에 손바닥을 올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응답하라. 쿵. 남자랑 남자랑 사귈 수 있나? 글쎄. 그럼 너, 최동오랑 안을 수 있어? 그건 경기 끝날 때마다 하는데. 입술은? 붙일 수 있어? ...글...쎄? 물음표가 붙은 시점에서 이미 망한 거였지만 그 당시의 정성구는 그걸 알기엔 한참 어렸다.
이제 체육관에 있으면 코트 바닥과 밧슈가 마찰하는 소리, 농구공을 튕기는 소리, 림을 통과하는 소리에 귓가에서 쿵쾅대는 제 심장 소리가 추가되었다. 농구를 할 때면 그렇다 쳐도 다른 소리가 사라지는 기숙사에서는 귀도 속도 시끄러웠다. 제법 가까운 사이인지라 최동오는 정성구 방에 자주 쳐들어와 드러누워 있곤 했다. 혼자 있으면 심심하다나 뭐라나. 누군 심란해 뒤지겠는데. 덕분에 혼자 있을 시간에 최동오랑 계속 붙어 있게 됐고 귓가에서는 드럼 파티가 열렸다.
사랑과 우정 사이, 유명한 노래의 제목을 노트에 끼적이면서 정성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살아 온 시간의 대부분을 농구만 하고 지냈던 청소년은 뒤늦게 찾아온 심장의 박동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심장은 원래 그냥 뛰는 거 아니야? 그러니 사랑이 뭔지 알 리가 있나. 어머니께서 보시던 드라마에서는 사랑에 빠지면 막, 얼굴 뒤에서 빛이 나고, 배경에 벚꽃잎이 휘날리고 그러던데. 최동오 뒤에는 농구 코트랑 림만 있었다. 당연하지, 거의 코트 위에 있으니까. 후광? 걔는 뒤에서 나는 게 아니라 얼굴에서 빛이 나. 하여간 그런 거창한 말 말고, 좋아하는 건? 그건 맞는데. 싫어했으면 삼 년 가까이 쟤랑 붙어 다녔겠냐고.
입시를 준비하는 다른 학생들과 다르게 농구부 주전들은 진학할 대학이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한동안은 대학에서 영입 제안을 철회하겠다는 전화를 받는 악몽까지 꿨지만 현실에선 그런 일이 없었다. 정성구는 진작에 진학할 대학을 골라 놓았다. 고교 삼 년 내내 다른 지역에서 살았더니 이제 나고 자란 곳에서 좀 더 살고 싶었다. 어머니가 대학생이 되어도 타지 생활할 거냐며 쓸쓸해 하시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최동오는 아직 고민 중인 것 같았다. 정성구가 가는 대학에서도 제안이 갔다고 들었는데. 이번에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아니, 심장에는 안 좋을지도.
괜히 교실에서 분위기 흐리지 말고 나와서 후배들 봐주고 너희들 개인 운동도 하고 그래. 윈터컵 전에 모두 은퇴하는 삼학년인지라 이미 이학년 중심으로 부 활동이 굴러갔고, 아쉬워도 전국대회 패배의 설욕은 후배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감독님은 체육관을 편하게 쓰라고 하셨지만 바짝 기합 든 후배들 있는 곳에서 설렁설렁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그래서 막상 체육관에 죽치고 있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른 저녁부터 한 방에 모여서 시시껄렁한 사담을 나누곤 했다. 오늘은 연애 얘기였다.
대학 가면 여자친구는 알아서 생긴다던데. 감독이나 코치들이 한참 다른 유혹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을 달래는 단골 멘트였다. 농구에 미쳐 사는 애들이었지만 그래도 아직 고등학생이라, 대학 생활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핑크빛 망상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상형, 데이트, 결혼, 어디로 가는지 모를 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하던 얘기는 곧 현실로 돌아왔다.
“졸업식 때 단추 줄 사람은 있어?”
“있겠냐. 죄다 빡빡이들인데.”
빡빡이에서도 졸업이다, 속이 다 시원하다. 한바탕 웃고 나서는 다른 학교의 소꿉친구한테 주기로 했다고 수줍게 웃는 친구 하나를 실컷 놀렸다. 자랑한 죄-아직 고백도 안 했다는 변명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로 신현철에게 레슬링 기술을 당해야 했지만 그러고도 싱글벙글한 게, 저렇게나 좋을까 싶었다.
정성구 쟤 건 저래놔서 누가 뜯어나 가겠냐? 모두의 시선이 벽에 걸린 정성구 교복에 가 닿았다. 대부분 운동복을 입는 농구부 특성상 교복은 삼 년을 입었어도 닳은 곳 없이 새것 같았는데, 그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단추가 있었다.
실습 중에 마무리만 하면 끝나는 거라 작업복으로 안 갈아입었던 게 패착이었다. 무늬가 사라질 정도로 녹아 뭉개진 단추를 보면 누구든 꼭 그걸 만져 봤다. 심지어 선생님들조차도. 보기 안 좋으니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말에 어차피 교복 입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요, 하면 깐깐한 선생님도 넘어가 줬다. 그러니까, 이럴 줄 몰랐으니까.
최동오 서울로 간다더라. 오전에 이명헌이 슬쩍 귀띔해 준 내용이었다. 헤어지는구나. 아니 뭐, 농구 하다 보면 당연히 또 만나겠지만 삼 년 내내 붙어 있다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괜히 속이 허했다. 아무래도 자기 살던 지역이 편하긴 했겠지. 나처럼. 산왕에서 만나서 나랑 친해진 것처럼 그 대학에서 새 친구를 사귀고, 잘생긴 놈이니까 고백도 받을 테고, 그러다 보면 애인도 생길 테고. 전화한다 해도 지금처럼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긴 어려울 게 뻔했다. 그러다 오랜만에 만나면, 걔 얼굴을 봐도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나? 그건 좀 싫은데.
다들 방으로 돌아간 이후 단추를 있는 힘껏 노려보던 정성구는 충동적으로 단추를 쥐어뜯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랬는데. 대강 힘으로 뜯어낸 단추는 열에 녹아 뭉개진 데다가 뜯으면서 같이 떨어져 나온 실까지 엉켜 영 모양새가 별로였다. 그래도 두 번째 단추를 줘야 한다니까. 그것도 심장에 가까워서 그렇다더라, 는 소리까지 들은 와중에 다른 걸로 바꾸기도 애매했다. 실은 억울하기도 했다. 반년을 쿵쿵대는 소리에 속 시끄러웠는데 정작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단추는 못 준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어차피 한동안은 못 볼 테니 눈 딱 감고 던지고 와야지. 그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쪽팔려 죽을 것 같긴 한데 언젠가는 침대에서 발차기하는 정도의 흑역사로 남지 않을까. 엉킨 실을 대충 가위로 잘라냈더니 단추 뒷면에도 기스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신현철한테 쪽가위라도 빌려 올걸.
반쯤 오기로 패기있게 단추를 떼던 어제는 어디 갔는지, 정성구는 어깨를 굽힌 채 최동오 라커 앞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누가 보면 라커에서 뭔가 훔쳐가는 외부인이라고 착각할 만한 모양새였다. 널 좋아했어, 나랑 사귈래? 본인이 오그라드는 건 둘째치고 아무리 생각해도 최동오 같은 놈한테는 역효과일 것 같았다. 어차피 정성구 교복 단추 그 지경이 된 거 모르는 놈들은 없고, 하다못해 옷 입고 다니는 꼴 보면 대강 눈치는 챌 것 같았다. 최동오랑 그렇고 그런 사이는 못 되어도 친구까지 못 하는 건 좀 억울하니까. 뻔뻔하게 그런 일 없었던 척하면 그동안의 의리를 봐서라도 친구 정도로는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뭐해?”
“어, 아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후다닥 도망 나온 정성구는 하루 내내 최동오 눈치를 봤다. 봤나? 알았나? 못 봤나? 모르나? 연습게임 하는 걸 보니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처구니없는 슛을 해 놓고 니가 잡을 거잖아, 얄밉게 웃었을 땐 열이 받아서 심장이 뛰었다. 차라리 결과를 모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샤워하고 나온 후 라커 문 앞에 붙박이처럼 서 있는 뒷모습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봤구나. 알았겠구나. 정성구는 빛의 속도로 옷을 입고 도망쳤다. 그날 저녁에는 방에 최동오가 놀러 오지 않았다. 확인사살이었다.
최동오는 시선도 피하고, 용기를 내서 건넨 물병도 어색하게 받아 들고 자리를 뜨고, 다가오다가도 정성구 얼굴을 보면 로봇처럼 삐걱거리면서 뒤를 돌았다. 오죽하면 주장을 후배에게 넘겨주고 이젠 자유다삐뇽, 하고 드러누운 이명헌이 니네 싸웠냐고 오지랖을 발휘할 정도로. 오후 일과가 끝나자마자 후다닥 도망가는 최동오를 보면서 정성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망했네.
틀어진 사이-애초에 틀어진 게 맞나?-를 어떻게 해 보지도 못하고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과장 조금 보태서 눈 몇 번 감았다 뜨니 졸업식이었다. 그동안 최동오는 누가 봐도 알 정도로 정성구를 피해 다녔고 정성구는 뒤통수마저 잘생긴 빡빡이를 붙잡지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어야 했다. 뒤통수만 보는데도 심장은 여전히 귓가에서 쿵쿵댔다.
사람은 이래서 충동적으로 저지르면 안 된다. 허전한 교복 재킷의 두 번째 단추 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정성구는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푹 쉬었다. 정성구, 마지막까지 물먹은 솜처럼 그러고 있을래? 빨리 나와, 체육관에서 사진 찍는대. 당분간 얼굴 못 볼 테니 사진이라도 가져야겠다. 지갑에 여자친구 증명사진을 넣어 놓고 부적이랍시고 애지중지하는 같은 반 친구 놈이 이해가 가는 지경이었다. 물론, 걔 여친은 가녀리고 예쁘지. 아 왜. 최동오도 잘생겼어.
림을 배경으로 농구부 단체 사진 한 장, 졸업생만 모여서 한 장. 그리고 친한 애들끼리 여기저기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이명헌이 몇 명을 따로 불렀다. 대학 가서도 농구 할 놈들끼리 하나 더 찍자. 나중에 한 놈이라도 잘 나가면 방송사 자료화면으로 써먹자삐뇽. 도대체 생각의 흐름을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최동오랑 사진 한 장 더 찍는다는 거지? 명헌아, 또라이 새끼라고 한 거 너는 모르겠지만 사과한다. 대학까지 가서 농구 하는 놈은 산왕에서도 많지 않은 터라 운 좋게 최동오 옆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명헌의 운영에 모든 것을 맡긴다. 두 장 달라고 해야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좋아하는데 최동오가 정성구를 불러 세웠다.
“야.”
“어? 나?”
“너 잠깐 나 좀 보자.”
최동오를 따라 나가면서 뒤를 돌아보자 친구들이 손짓발짓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이니까 어떻게 잘 풀어 봐라, 같은 얘기일 게 뻔했다. 낙수가 눈을 부라리며 입에 자크를 채우는 표시를 했다. 닥치고 듣기만 해. 와, 방금 김낙수 목소리 들린 것 같아.
말 붙일 틈도 찾지 못하고 최동오 뒤를 따라갔다. 기껏해야 삼사 분 남짓일 텐데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길을 걸어 체육관 뒤편 나무 앞에 마주 보고 섰다. 이학년 때 슬럼프 왔던 최동오한테 음료수 건네줬던 그 나무다. 꼿꼿하게 선 게 딱 최동오 닮은 나무.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는 없어서 애매하게 시선을 피하는데 시야 가장자리에 뭔가 걸렸다. 여기저기 뜯긴 자국이 있는 단춧구멍들. 그리고 깔끔하게 뜯긴 게 확실해 보이는 두 번째 자리.
아, 누구 줬구나. 맥이 탁 풀렸다. 졸업식 날에는 외부에서 가족들이 온다. 졸업생 중에서도 이름을 알 법한-대부분이 농구부인- 애들은 친구의 부탁을 받은 여자 형제나, 혹은 진짜로 팬인 다른 외부인에게 두 번째 단추를 뜯기곤 했다. 다른 단추도 사정은 같았다. 심지어 아침부터 기숙사에서 진 치고 있다가 선배의 단추를 반쯤 강탈해 가는 후배도 있었다. 부적이라나 뭐라나. 정성구도 기숙사 방문 앞에서 기다리던 후배에게 단추 하나를 줬다. 선배 단추 가지고 자면 키가 클 것 같단다. 무슨 무속신앙도 아니고. 그 마음 모르는 건 아니라 알겠다고 북 뜯어서 줬다. 그러니까 후배들한테 줬을 수도 있지 않나? 그럴 리가 있나. 최동오는 볼에 젖살이 안 빠졌을 나이에도 전국적으로 유명한 놈이었다. 농구 잘하고, 잘생긴 애. 인생 첫 실연에 속이 쓰렸다. 차라리 다른 학교로 진학해서 다행이다. 캠퍼스 안에서 데이트하는 최동오를 봤다간 심장이 터져버릴 게 뻔했다. 곧 내려질 선고를 각오하는데 정작 최동오 입에서 나온 말은 다른 얘기였다.
“손 내놔 봐.”
“...어?”
기분 나쁘니까 꺼져, 다시는 보지 말자, 뭐 그런 거 아니고? 최동오 성격상 그런 말 할 놈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사랑에 빠진 청소년은 사고가 좀 극단적으로 튀는 편이니까. 정성구는 이미 온갖 막다른 경로를 한 번씩 상상해 본 터였다. 멍하니 서 있자 최동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손 내놓으라고! 누가 소리를 치면 반사적으로 그 말을 따르는 운동부의 본능답게 냉큼 두 손을 모아 내밀자 동그랗게 뭉쳐진 종이가 던져졌다. 종이에 줄이 그어진 걸 보니 노트를 찢은 모양이었다. 뭐야, 말로 못 하겠으니까 글자로 쓴 거야? 꺼지라고? 예쁜 편지지라도 써 주지. 하다못해 반듯하게 접기라도 해 주든가. 냉정한 자식.
흡사 쓰레기 같은 종이만 던져 놓고 가타부타 말도 없이 뛰어가는 빡빡이의 뒷모습이 야속했다. 야, 이럴 건 없잖아... 괜히 자기가 더 민망해진 정성구는 주변 눈치를 살피면서 손에 쥐어진 종이를 폈다. 사실 보고 싶지 않았지만, 호기심이 이겼다. 구겨진 종이 사이에서 무언가 발치로 툭 떨어졌다. 이거 뭐야? 주워들어 보니 단추다. 정성구도 잘 아는 단추. 얼마 전 자기 교복에서 떼어낸 두 번째 단추와 모양은 같은데 뭉개진 부분 없이 멀끔했다. ...내 거 돌려준 게 아닌가? 단추를 이리저리 돌려 보던 와중에 뒤늦게 손에 쥔 종이에 시선이 가 닿았다. 눈을 휘둥그레 뜬 정성구는 곧 다른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처 다 가려지지 않은 얼굴에서 광대뼈가 실룩거렸다. 아, 최동오, 진짜...
02-XXX-XXXX
전화해
쿵쿵, 심장이 기분 좋게 귓가에서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