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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い恋人

"마츠모토!"


마츠모토는 이 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이 익숙한 일이 아닌 듯 잠시 멈춰있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곧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았다.


"노베?"


노베는 반가움에 미소를 띠며 마츠모토에게 다가갔다. 이 곳에서 마츠모토를 만날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진짜 오랜만이다. 여긴 무슨 일이야?"


노베가 반갑게 묻자 마츠모토는 잠시 노베를 바라보더니 난 여기 사람이야 하고 말했다. 노베는 언젠가 들은 것도 같은 사실을 떠올린다.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갑다."
"그러게... 반갑다."


마츠모토는 전혀 반가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노베는 잠깐 자신이 마츠모토의 어떤 일을 방해한 것인지를 생각하다가 품에 있던 수첩을 꺼내 집 전화번호를 쓰고 종이를 찢어 마츠모토에게 건넸다.


"바쁘지? 우리 집 번호야. 시간 있을 때 한번 보자."
"그래."


노베는 얼마 전 아키타로 이사를 왔다. 아키타는 노베에게 낯설기만 한 곳은 아니다. 고등학교만 해도 시는 다르지만 아키타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눈이 키만큼 내리고 겨울에 게을러지는 사람들을 혼내주는 도깨비가 있다는 곳. 확실히 뿌옇게 눈보라가 치고 하늘이 회색빛이 되면 요괴나 설녀 같은 존재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되긴 했다. 노베는 크다면 큰 이 삶의 변화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 줄지 기대됐다.

​

마츠모토는 오늘도 술과 요깃거리를 사러 가기 위해서 외투를 입었다. 이 시간만이 마츠모토의 숨통을 틔워주는 유일한 시간이다. 마츠모토는 추위에 겉옷을 더 여미며 집 근처의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먹을 것들을 골라 계산대에 내려두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마츠모토의 어깨를 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음료수를 들고 있는 노베가 있었다.


"왜 연락 안 해?"


노베를 만나고 며칠이 지난 후였다. 마츠모토는 조금 놀랐지만 이내 대꾸했다.


"미안, 잊어버렸네."


마츠모토가 계산대에 올려둔 것들을 내려다본 노베는 혼자 마시지 말고 같이 마시자 하고 말했다. 더는 피할 길도 없어진 마츠모토는 핑곗거리를 생각해내다 결국 그래 하고 대답했다.
둘은 문이 열린 근처의 이자카야로 들어갔다. 오래돼 보이는 나무 문을 열어젖히자 추운 바깥의 공기와 다른 따끈한 실내의 온기가 둘을 감쌌다. 둘은 비어있는 창가 자리에 앉은 뒤 외투를 벗었다. 실내의 온도와 대비되는 외투에 어린 냉기가 몸을 떨리게 했다.
잠깐새에 다시 펑펑 내리는 눈이 보이는 창문 너머를 멍하니 보는 맞은편의 마츠모토에게 노베는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다. 두 사람의 사이에 묘한 마가 뜬 사이 주문했던 술이 먼저 나왔다. 노베는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요즘 무슨 일 하고 지내?"


노베가 대화를 시작하자 마츠모토는 노베가 따라준 따뜻한 일본주 한잔으로 목을 먼저 축이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간병을 하고 있어."


노베가 알기로 마츠모토는 대학 졸업까지만 해도 농구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아버지가 어디가 편찮으셔?"
"그냥... 여기저기 안 좋으셔. 넌 왜 아키타에 왔어?"


노베는 마츠모토가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것이라기보다 더 이상 이 주제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아들었다.


"나 이번에 아키타 팀에 입단하게 됐어."


그렇구나 하고 대답한 마츠모토는 술을 또 입 안으로 넘겼다.


"천천히 마셔."
"하하, 그래."


노베는 마츠모토가 이렇게 거리감이 드는 친구였나를 되짚어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선 진학한 대학의 지역도 서로 갈리고, 연락도 개인적으로 하지 않았고, 동창끼리 모일 때나 한 번씩 얼굴을 보는 정도이긴 했지만 노베의 기억 속 마츠모토는 좀 더..


마츠모토는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노베가 한 잔을 마실 때 마츠모토는 혼자서 세 잔을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고선 견디지 못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랬다. 처음이야 근황 같은 것들을 나누며 대화다운 대화를 했지만 취기가 오를수록 마츠모토는 말수가 줄더니 나중엔 입을 다물다시피 했다. 중간중간 마츠모토의 속이 걱정된 노베가 안주를 마츠모토의 입술에 대면 마츠모토는 그것을 가물가물한 눈으로 받아먹었다.


술을 몇병이나 비웠을 때쯤엔 결국 취해서 눈을 감고 벽에 고개를 기댄 마츠모토를 앞에 두고 노베 혼자서 술잔을 기울였다.


"진짜 지겨워..."


자는 줄 알았던 마츠모토가 중얼거렸다.
어느새 어둑한 밖은 눈보라가 몰아쳤다. 다설지답게 이곳은 온종일 눈만 내렸다. 노베는 취한 마츠모토의 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메 잡고 한쪽 팔론 마츠모토의 허리를 받치고 천천히 눈길을 걸었다. 술이 들어가 조금 느슨해진 마츠모토는 순순히 자신의 집 위치를 불었다. 거센 눈발은 마츠모토의 옷깃 사이로, 폴라티의 목과 옷 틈 사이로까지 들어갔다.
아키타의 주택가에 보이는 나무들은 집마다 각기 다른 모습의 구조물을 달고 있다. 나무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목을 세워둔 것이다. 노베는 늘어지는 마츠모토의 몸을 추슬러 올리며 아까 마츠모토를 만났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따뜻한 차 한 병을 산 뒤 마츠모토의 외투 주머니에 그것을 넣었다.


"집 가서 먹고 자."


고개를 끄덕거리는 건지 단지 취해서 기우뚱거리는 건지 모르게 몸을 흔들거리는 마츠모토의 팔을 끙 소리를 내며 한 번 더 고쳐맨 노베는 마츠모토의 집으로 천천히 향했다.

아침부터 마츠모토는 아버지를 새로 깐 이부자리에 반듯이 누이고 이불 빨래를 했다. 그리고 부드러운 천을 가져와 미지근한 물에 적신 뒤 아버지의 얼굴을 살살 문질러 닦았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아버지가 토를 해서 정신이 없었다. 이제야 숨을 좀 돌리려나 할 때쯤 어머니가 마츠모토를 찾아왔다.


"미노루 네 친구한테 전화 왔어."


여기로 전화 올 친구는 없을 텐데. 마츠모토는 손수건을 세숫대야에 걸쳐 두고 복도로 가 전화가 놓인 낮은 협탁 옆 나무 바닥에 앉았다.


"여보세요."
-마츠모토, 나 노베.


그제서야 마츠모토는 얼마 전 밤의 이자카야에서 연락처를 알려준 것이 떠올랐다.


"아, 노베."
-너희 어머니셔? 너랑 목소리가 똑같다.
"응 우리 어머니. 그날 데려다줘서 고마워."
-별거 아니야.
"너무 취했던 것 같아서 미안하다... 아 그리고 그날 술값 줄게."
-오랜만에 만난 건데 내가 낼게. 그보다 네 지갑을 내가 가지고 있더라. 시간 될 때 또 보지 않을래?


노베를 만나고 다음 날 아침, 마츠모토는 바닥에 던져뒀던 외투를 정리하다 주머니에 넣어져 있던 차를 보고 흠칫 놀랐다. 마츠모토는 노베의 이런 관심이나 호의 같은 것들이 영 새삼스럽지만은 않았다. 걔는 고등학생 때부터 그런 살뜰한 녀석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노베가 주는 것들이 편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또 노베를 만나야 한다면 조금 자신이 초라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당분간 시간이 안 돼서.. 그건 그냥 버려도 돼."
-뭐?
"미안, 나 지금 바빠서... 다음에 다시 연락하자."


마츠모토는 어디에 쫓기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전화를 끊었다. 본인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란걸 알았다. 그 지갑은 마츠모토가 고등학생 때 선물 받고 지금까지 아껴 쓰던 것이었다. 마츠모토는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츠모토의 일상은 다시 평소대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출근한 시간엔 마츠모토가 아버지의 간병을 하고, 어머니가 간병을 하는 시간엔 잠을 자거나 밥을 먹거나 책을 보거나 했다. 더는 예상치 못한 때와 장소에서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가 끼어들지 않는다.


마츠모토는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일과를 마무리했다. 걸레를 몇번에 걸쳐 깨끗한 물에 빨고 힘을 주고 걸레를 비틀어 물기를 짜냈다. 그리고 난로 위에 걸레를 널어둔 뒤 손의 물기를 닦고 저녁 준비를 하는 어머니가 있는 부엌으로 갔다.


"미노루 토마토 좀 꺼내줄래?"


냉장고를 열고 토마토를 찾는데 음료 칸에 노베한테 받은 뒤 먹지 않고 넣어둔 차가 보였다. 마츠모토는 찾은 토마토를 꺼내고 냉장고 문을 닫았다.


"오늘 저녁은 뭐에요?"
"고등어조림."
"혹시.. 저한테 전화 왔던 거 없어요?"
"없었는데?"


마츠모토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토마토를 씻었다. 무슨 대답을 바란 거지 나는.

노베는 오늘도 출근해 팀훈련을 마치고 개운하게 씻었다. 라커룸에선 로션을 챙겨 바르고 향수까지 뿌렸다. 웬일로 노베가 훈련 후에 향수를 뿌리는 것을 보고 동료가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느냐고 물었다. 노베는 피식 웃으며 아니라고 했다.
어젯밤 마츠모토에게 전화가 왔었다. 마지막 통화 이후 거의 이주만이었다. 마침 오늘 훈련이 끝나면 시간이 될 것 같아 마츠모토에게 만나자고 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약속한 시간이 다 되어가 노베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옷을 껴입고 약속 장소에 뛰어가자 체육관 근처에 있는 가게의 앞에서 약속대로 마츠모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꼿꼿이 서 있는 마츠모토의 등을 가볍게 툭 치니 마츠모토가 홱 돌아봤다.


"추워서 얼음이 될까 봐 빨리 왔어."


마츠모토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쏙 파인 보조개 같은 뺨이 노베의 시선에 들어왔다. 괜히 구단 체육관 근처로 부른 건 아닐까? 농구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건가? 마츠모토는 정말로 더 이상 농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까? 마츠모토는 행선지도 정하지 않고서 걸음을 떼며 물었다.


"어디로 갈까?"
"아! 네 지갑을 안 가져왔어."
"안 줘도 돼."


자신의 손을 떠난 순간 그건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다. 버려지든 훔쳐지든 되돌려받든 상처 입든.
이 날 이후로 노베는 종종 마츠모토에게 놀자고 연락을 해왔고 마츠모토는 거절하지 않았다. 만나면 하는 일은 비슷했다. 함께 밥을 먹거나, 술을 먹거나, 산책을 하거나였다. 그럼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사람도 만나지 않고 집에서 간병만 하던 마츠모토는 노베와의 시간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팍팍했던 일상이 좀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오늘도 마츠모토의 심심하다는 말에 노베가 운동을 끝내고 차를 끌고 마츠모토의 집으로 왔다. 둘은 드라이브를 떠났다. 어둑한 밤 희미한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눈 사이의 도로를 달리고 달렸다. 목적지는 없다. 둘은 카라디오도 틀지 않고 별 말도 하지 않았다. 노베는 앞을 바라보고 마츠모토는 조수석에서 창밖만 바라보았다. 사람도 차도 불빛도 없고 고요해 꼭 세상엔 둘만 있는 것만 같았다.
근처에 호수가 있다는 마츠모토의 말에 노베가 호수에서 차를 멈추고 둘은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호수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깜깜해서 보이는 것도 잘 없었다.
노베는 뜸을 들이다 마츠모토를 만난 이후로 계속 궁금해했던 것을 물어봤다. 왠지 지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있잖아.. 농구 왜 안 해? 너 잘했었잖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몰라."


마츠모토는 또 대답 거부 시위다. 최근 노베가 알게 된 것은, 마츠모토는 농구 얘기가 나오면 싫어한다는 것이다. 굳이 싫어하는 얘기로 속을 긁고 싶진 않지만 노베는 마츠모토가 농구 얘기에 민감하게 굴 때마다 꼭 자신도 부정당하는 것 같아 반발심이 들었다. 농구와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좀.. 속이 상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얘기를 안 해줄 줄은 몰랐는데. 노베는 영 뒷맛이 씁쓸했다.

호수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주말, 둘은 노베의 집에서 만나 노베가 이사 기념 선물로 받은 와인을 땄다. 어느새 둘은 주에 두 번은 꼭 만나는 것이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함께 거실 바닥에 늘어져 소파에 기대어 노베가 끓여준 전골과 함께 와인을 마시며 콘솔 게임을 했다. 창밖으론 새하얀 눈이 내리고 따뜻한 국물과 와인은 추운 날씨와 잘 어울렸다.
마츠모토는 낮 동안 질릴 만큼 게임을 해 나중가선 노베 혼자서 가상의 적과 싸웠다.


"오늘은 집에 일찍 안 가봐도 괜찮아?"
"어머니가 하루종일 봐주시기로 하셨어."


노베는 그렇구나 하더니 모니터에 빠져들어 갈 것처럼 집중해서 게임을 했다. 애도 아니면서 입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며 게임에 몰입했다. 마츠모토는 노베와 이렇게 있으려니 왠지 고등학생 때 기숙사 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둘이서 방에 함께 늘어져 만화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곤 했었다. 시간도 이만큼이나 흐르고 자신도 변해버렸는데 어째 노베만은 변한 것 같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마츠모토는 그때의 마음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내가 거기서 리바운드를 잡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충동적으로 한 일이었다. 열심히 게임을 하던 노베는 언젠가부터 컨트롤러를 내려놓고 미주알고주알 자신의 경기 얘기를 늘어놓는데 마츠모토의 머리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츠모토는 문득 노베와 닿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눈에 걸리던 노베의 큰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노베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얽는데 노베가 손을 쑥 빼냈다.
마츠모토는 거절을 당했다는 것에 참을 수 없이 서운함이 몰려왔다. 옆에 두었던 와인잔을 가져와 마시며 방금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기 위한 표정 관리에 온 정신을 쏟았다.
노베는 얘기를 멈추고 다시 혼자서 게임을 했다. 마츠모토는 노베의 그런 행동 마저 자신을 온몸으로 거절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마츠모토는 와인을 들이키며 화면을 보는 척을 했다. 기분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화가 났다 감정이 널뛰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 분노가 차올랐다.


"안주 더 줄까?"


침묵을 깨고 노베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무 일도 없던 양 물었다. 마츠모토는 자신이 쥐고 있는 잔을 던져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집을 온통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흙과 눈으로 더러워진 신발로 집 안을 누비고 세간을 부숴서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집 갈래."


마츠모토는 집으로 돌아갔다. 노베는 잠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게임기와 상을 치웠다. 그리고 청소를 끝내고 나니 전화벨이 울렸다. 마츠모토와 노베와 고등학교 때 함께 농구를 했던 카와타였다. 카와타는 노베가 새로 가게 된 구단은 괜찮은지, 아키타는 살만한지, 건강한지 따위를 물었다. 동창들 사이에서 가장 모두와 두루두루 친했던 카와타는 졸업을 한 후 동창들을 모아 자리를 만들 때에도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사람들을 잘 챙겼다. 그다지 좋지 못한 기분이던 노베도 카와타와 얘기를 하다 보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맞다. 나 요즘 마츠모토랑 자주 놀아."
-마츠모토가 지금 거기에 있어? 통 연락이 안 됐었는데. 마츠모토는 잘 지내?
"응 잘 지내."


노베는 말하면서도 이건 거짓말이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마츠모토가 대학리그까지만 해도 잘 뛰어놓고 드래프트에 참가도 안 하고 그렇다고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연락이 안되더라고.


마츠모토에게 요구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마츠모토가 해야 할 일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노베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마츠모토를 가까이서 지켜보면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단 건 노베가 아닌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잘 얘기해볼게."


노베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몰랐던 주제에 하고 자조했다.


"알아서 잘하는 애잖아."

​

아버지의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되어 병원으로 옮겨져 입원하게 되었다. 그래서 마츠모토도 아버지를 따라 병원에서 간병하게 되었다. 주변 병상의 환자와 그 환자의 가족들은 그런 마츠모토를 두고 효자라고, 기특하다고들 했다. 마츠모토는 웃음으로 대답을 때우며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노베에게는 그날 후로 연락이 없었다. 마츠모토는 아무것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내 노력만으로 잘 굴러가던 때도 분명히 있었는데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노력만으로는 되지가 않았다.
마츠모토는 불행에 슬퍼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원하는 삶의 모습이 있어도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삶이라고 마츠모토는 몇번을 겪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주어진 일을 하다 보면 뭐든 나아질 거란 생각 하나만으로 마츠모토는 견뎠다.
그런 것들보다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드는 건 노베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혼자일 땐 괜찮았는데, 하나도 힘들지 않았는데 노베가 온 이후로 외로움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노베에게만큼은 동정받고 싶지 않다. 그런 건 정말로.. 싫다.
마츠모토는 가슴이 답답해져 병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었다. 하염없이 걷다가 불 꺼진 1층 로비의 빈 의자에 앉아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로비 구석에 비치된 공중전화기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마츠모토는 다시 병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버지의 검사를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은 후에 어머니가 여벌 옷과 세면도구를 가지고 병원으로 와 마츠모토와 교대해주어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니 고요함이 마츠모토를 반겼다. 오랜만에 느끼는 정적은 혼자라는 감각을 더 일깨워줬다. 마츠모토는 우선 샤워를 했다. 밤을 새워서 당장 잠들고 싶을 만큼 지쳐 있었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 씻지 못해서 매우 찝찝했다. 그리고 씻고 나와선 어질러져 있는 집을 정리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한창 이불을 털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안녕.


기다리던 목소리였다.


"응."
-뭐 하고 있어?
"씻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


노베가 다정한 것이 싫다. 너 때문에 나는 혼자일 때 힘들어져 버렸는데.


-아니 팀 동료가 자기 고향에 좋은 농구 선생 자리가 생겼다는데 네가 생각나서. 가보면 어떤가 해서 얼른 전화했어. 그리고 거기서 연습도 하면서 감 찾으면 드래프트 참가해보는 거 어때?


갑자기 마츠모토는 심기가 뒤틀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참으려는 시도도 없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이 나왔다.


"네가 뭔 상관이야?"
노베는 당황한 듯 말이 없었다. 마츠모토는 그게 준비 신호라도 된 양 퍼붓기 시작했다.
"난 이제 농구 안 해. 이딴 집구석에서 어떻게 농구를 해."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으면서도 제멋대로 말이 나오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만지지도 못하게 하면서 위해주는 척 하지 마. 날 좋아하지도 않는 주제에."


동시에 노베를 다시 만난 날 이자카야에 따라간 것이 후회가 됐다. 너무나도.
마츠모토는 말을 끝마치고도 분에 못 이겨 숨을 씩씩 몰아 내쉬었다. 그리고 노베의 대답도 듣지 않고 수화기를 쾅 내려놓아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말은 왜 했지? 나만 이러는 것 같잖아.
한번씩 가슴에 뜨거운 것이 차오르면 해소할 방법이 없다. 내가 모든 것을 망친 것만 같다. 마츠모토는 방에 올라가 이불을 덮고 도망치듯이 잠들었다.

몇시간이 지났을까, 창문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 잠귀가 밝은 마츠모토는 잠에서 깨어났다. 잠이 덜 깨 몽롱한 채로 누워있는데 엔진 소리는 사라지지 않고 몇십분간 이어졌다. 마츠모토의 집은 다른 주택가와 떨어져 있는 데다가 막다른 골목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차를 오랫동안 대놓을 사람은 없어 마츠모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봤다. 밖은 어느새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다.


마츠모토의 창문에서 마주 보이는 길의 양옆으로 치워져 높게 쌓인 눈 가운데에는 헤드라이트와 시동을 켠 채로 서 있는 은색 세단 한대와 그 옆의 키가 큰 사람이 한명 서 있었다. 마츠모토는 그 사람이 누군지 실루엣만으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헤드라이트 탓에 눈의 굴곡을 따라 그림자가 지고, 라이트가 비춘 수많은 한 사람의 발자국은 눈이 아닌 마츠모토의 마음을 즈려밟은 것 같았다.


마츠모토는 노베가 이 곳까지 찾아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눈 녹듯 풀리는 자신에게 저항감을 느끼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마츠모토는 고민을 하다가 외투를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노베는 대문이 열리고, 자신에게 걸어오는 마츠모토를 발견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왜 찾아왔어."
"화내지마."


노베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말로 안 하면 난 알 수 없어."
"...."
"네가 이랬다저랬다 하면 난 어느 쪽이 네 진짜 마음인지 모르겠어.."


마츠모토는 입을 다물고 노베의 가슴께만 노려봤다. 마츠모토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의 자신이 생각했던 나중의 모습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말했던 거 잘 생각해봐."


노베는 차를 타고 돌아갔다.

아버지는 검사 결과 일단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으니 경과를 지켜보자는 결론이 나와 퇴원을 하고 다시 집으로 가게 되었다. 마츠모토는 멍하니 방 침대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마츠모토는 기차에 올랐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작은 열차의 창밖으론 온통 하얀 설국이었다. 나무로 빽빽한 산도 땅도 지붕도 모두 하얀 눈으로 뒤덮이고 햇빛까지 더해져 뿌옇게 반짝였다. 게다가 눈은 소리를 흡수하는 효과라도 있는지 기차 소리를 제외하곤 온 세상이 고요했다. 예전엔 이 기차를 많이 탔었다. 기차는 달린 지 한 시간을 훌쩍 넘어 도착지에 다다랐다. 마츠모토는 기차에서 내려 오랜만에 봐도 익숙한 길을 걸었다. 사람이 드문 거리를 걷고 걸어 마츠모토는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에 도착했다. 마츠모토도 한때 이 곳에서 꿈을 꾸고 생활을 했었다.


마츠모토는 교정을 구경하며 옛 추억을 떠올리다 여기 오게 된 이유인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엔 농구부원들이 한창 연습 중이었고 마츠모토는 연습 장면이 훤히 보이는 2층의 벤치로 가 앉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보기만 했다. 이젠 감독님도 바뀌고 학생도 아는 사람이라곤 한명도 없는데 마츠모토는 자신이 농구를 했던 곳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없어질세라 바라봤다. 학생들은 제각각의 집중한 얼굴로 이 추운 날씨에도 땀을 흘리며 공을 튀겼다.
그리고 마츠모토는 생각했다. 나만 멈춰 있었구나. 나도 현실을 살아야겠구나.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구나. 나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있고 싶은 곳으로 가고 싶다고...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되었지만 마츠모토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러 갔다.
마츠모토는 고개를 택시의 창문에 기대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밤거리와 흘러가는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예전엔 이 곳에 갇혀있다고만 생각해서.. 눈이 와서 육로도 하늘길도 막히면 영영 어디로도 갈 수 없을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근데 나를 가둔 건 누구였을까.
여태껏 했던 말과 행동을 모두 주워 담을 수 있을까?

며칠이 지났을 때쯤 마츠모토가 노베에게 연락해왔다. 둘은 노베의 집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만났다. 몇 번 둘이서 만난 적이 있는 곳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노베가 먼저 운을 띄웠다. 마츠모토는 대답을 못 하고 한참 입을 뗐다 붙였다 했다. 말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노베는 그런 마츠모토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다 뒤를 휙 돌아 자리를 떠났다. 노베가 가는 걸 보고 심장이 철렁한 마츠모토는 노베를 뒤따라가 노베의 옷깃을 잡았다.
노베는 잠깐 물을 가져다주려고 뒤를 돈 것이었는데 마츠모토는 자신한테 실망한 건 줄 안 건지 다급하게 붙잡는 것을 보고 노베도 덩달아 당황했다.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건지.. 노베가 해명하려는데 마츠모토가 횡설수설 자신의 마음을 얘기했다.


"나도 혼란스러워. 아직은 모르겠어, 근데 하고 싶은 것 같아."


말은 두서없이 나왔지만 솔직한 마츠모토의 마음이었다.


"근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노베는 씩 웃었다.


"그런 건 하나씩 해나가면 돼."


노베의 말에 마츠모토는 안심이 되면서도 살짝 발끈했다.


"네가 내 감독이야?"


뻔히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농구 얘기만 하는 노베가 조금 야속했기 때문이었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데.."


그 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또 말을 하고 싶지 않은데 마츠모토는 문득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던 노베의 말이 떠올랐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마츠모토가 중얼거렸다.


"좋아해."


노베는 웃었다.


"나도 좋아해."


노베는 마츠모토를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마츠모토는 입술을 꽉 물고 노베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노베의 양 볼을 잡아당겨 키스했다. 노베는 마츠모토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 둘은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정신 없이 키스하다 마츠모토의 힘에 밀려 노베의 뒤의 무릎께까지 쌓인 눈밭에 푹 쓰러져 함께 묻혔다. 그래도 둘은 멈추지 않고 누워서 입을 맞췄다. 눈이 옷 안으로 들어오고 서로의 입술이 차갑게 식어도 계속해서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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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노베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발코니 창밖 가득히 보이는 새하얀 설원이었다.
노베는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있던 마츠모토의 맨 다리를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가두어 고간 사이로 꼭 끌어당기며 이불을 덮어주었다. 차가운 다리가 뜨끈한 다리 사이로 끌려와서 갇히고 둘의 체온이 섞였다. 노베는 이제는 많이 긴 마츠모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굳히고 잠든 얼굴을 뜯어봤다. 피곤하게 생긴 미남. 까까머리일 때는 순진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는데.


이자카야에 갔던 날 밤, 마츠모토는 노베에게 고등학생 때 좋아했었다고 말했었다. 술이 깬 후 마츠모토는 말한 것 조차 기억 못하는 것 같았지만. 노베는 그냥 친구라고만 생각했던 마츠모토가 자신을 좋아했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기에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근데 돌이켜보니 또 영 짚이는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를 좋아했었구나.. 그 사실을 알게 되니 새로운 감정이 노베를 움직였고, 마츠모토를 좀 더 알아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마츠모토와 시간을 보내며 생각해볼수록 마츠모토가 좋아하는 것을 과거로 해두기만 하는 것이 슬펐다. 농구도 자신도.. 점점 자신도 농구도 포기하지 말았으면 하게 되었다.
마츠모토가 그곳에 가게 되면 아키타를 떠나야 한다. 그럼 나와도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하도 훌쩍 떨어져 있어 만나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노베는 이곳에서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는 마츠모토를 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엄청 만지작거리네."


언제 깼는지 마츠모토가 눈을 뜨며 말하고 노베는 머쓱해져서 손을 내렸다. 그러자 마츠모토가 노베의 맨 가슴에 얼굴을 쏙 넣으며 노베의 허리를 껴안고 품에 엉겨 붙어왔다. 둘은 친구로 지낸 기간이 더 길었기 때문에 이런 서로의 모습에 낯설어하고 있었다. 마츠모토는 노베의 가슴팍에다 대고 말했다.


"떨어졌는데..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퍽 귀여운 질문을 들은 노베는 그게 좀 의외여서 웃었다.


"전화하면 되지. 만나러도 갈게."


마츠모토는 대답이 없었다. 노베는 얼굴이 안 보이는 마츠모토의 하얀 날개뼈를 일정한 리듬으로 두드렸다.


"보고 싶을 때마다 전화하고 편지 하자."
"응."


아키타에 올 때 마츠모토와 이런 사이가 될 줄은 몰랐듯이 마츠모토가 타지로 가면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또한 모를 것이다. 다만 노베는 자신과 마츠모토가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두려워하고만 있지 말고 순간에 최선을 다해 사랑할 수 있기만을 속으로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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