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사랑
1. 마츠모토의 첫사랑
좋아하는 게 얼굴에 다 보이는 애라고 생각했다. 너 형이 있었냐? 기숙사 일층에 모여 앉아 자판기 음료수를 하나씩 끼고 서로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밤. 카와타가 물었다. 난 짧은 머 리카락을 한번 쓸어보고 대답했다. 어, 열 살 차이. 그 대꾸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 있다는 건,
“와. 부럽네. 나도 형 갖고 싶었는데.”
그래. 으레 이런 소리를 듣기 마련이니까. 난 한참 어릴 때부터 주변으로부터 부러움 섞인 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때론 형이 있단 이유로, 때론 키가 크단 이유로, 혹은 농구를 잘한다는 이유로 쉽게 동경을 받아버릇해서 내겐 그게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인정해야 했다. 내가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것을. 그 애의 마음을 쉽게 봤다는 것도.
“아, 입학식 때 그 까만 코트 입고 있던 사람, 베시?”
“엉. 이제까지 뭘 들은 거냐, 후카츠.”
“……너무 작아서 노베 형일 줄 몰랐다, 베시. 충격, 베시.”
“야, 우리 형 그렇게 안 작다. 평균보다 커, 인마.”
“네 옆에 있으니까 거의 반만해 보였다, 베시….”
후카츠의 말에 거기 있던 일학년 모두 크게 웃었다. 나조차 웃음이 났다. 하긴. 그 말도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었던 말이다. 우리 형 키가 어느 정도 되더라. 그런 생각이나 하다가 앞에 놓인 음료수를 집어들고 한입 마시려는데, 문득 맞은편에 앉은 마츠모토와 눈이 마주쳤다. 마츠모토는 티가 나게 시선을 피했다. 불행하게도 짧게 깎은 머리카락 때문에 붉어진 귓바퀴가 훤히 드러났다. 나는 입안에 남은 차의 씁쓸한 맛을 느끼며 생각했다.
잘생기긴 했네, 라고.
“누나 있는 사람은 없냐?”
누군가의 장난스러운 말로 인해 화제는 쉽게 바뀌었다. 그날 마츠모토와 다시 눈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아키타도 한여름엔 더웠다. 농구가 실내 스포츠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코트 밖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던 마츠모토의 옆으로 가 앉았다.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마츠모토가 고개를 들었다. 드링크 있어? 그렇게 물으니 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병을 내밀어왔다. 받아드니 거의 안 마신 것처럼 무거웠다. 너부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야? 물었으나 마츠모토는 그저 고개를 한번 저었다. 나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시원한 드링크가 들어가니 타들어갈 듯 목구멍을 조이던 갈증이 단번에 해소되는 것을 느꼈다. 드링크에서 입을 떼고 마츠모토를 돌아보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눈이 마주쳤다. 아주 가끔, 이렇게 마츠모토와 눈이 마주칠 때가 있는데, 마치 그가 아주 오랫동안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어, 마츠모토!”
녀석의 허연 얼굴에 지나치게 선명한 붉은빛이. 그게 코피라는 것을 인식하기까진 금방이었다. 엉덩이가 들썩였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마츠모토의 작은 얼굴을 양손으로 그러쥐니, 허옇게 질려 있던 얼굴이 이젠 터질 듯 새빨개졌다. 소란에 이쪽으로 시선들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급히 목에 걸고 있던 타올을 마츠모토의 코 아래에 대주고 그를 일으켰다. 다른 한손으론 그의 뒷목을 붙들고 고개를 숙이게끔 했다.
“후카츠. 얘 보건실에 데려다주고 와야 할 거 같아.”
“그래. 다녀와, 베시. 어차피 쉬는 시간, 베시.”
마츠모토를 보건실까지 데려다주고 문밖에서 기다리는데 창밖으론 야구부가 동아리 활동에 한창이었다. 난 복도 타일의 깨진 부분을 실내화 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시간을 죽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혈을 마친 마츠모토가 보건실 문을 열어젖혔다.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음,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 들어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침 등 뒤에서 노을이 쏟아졌다. 야구부의 소음이 잦아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츠모토의 얼굴이 다시금 빨개졌다. 이번엔 진짜로 빨개진 건지, 노을 때문에 붉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었으나 어느 쪽이든 허옇게 질렸던 얼굴보다야 낫다고 생각했다.
“가자. 후반 이제 막 시작했겠네.”
“…어. 가야지.”
“넌 얌전히 벤치에 있어라. 코피도 난 애가.”
“고작 코피 가지고 뭘.”
“갑자기 시뻘건 피를 흘리는데. 내가 얼마나 놀랐다고.”
“하하. 나도 놀랐어, 노베.”
“너 요즘 잘 못 자? 피곤해?”
나란히 체육관을 향해 걸으며 나눈 대화는 굉장히 별거 아닌, 사소한 대화였음에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대화를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것이라고. 이상한 직감이 든 것 역시 나중의 이야기지만.
2. 아키타에서의 첫해, 겨울
겨울엔 여지없이 혹한이었다. 체육관에서 기숙사를 오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온몸에 한기가 들어 턱이 벌벌 떨릴 정도였다. 그걸 핑계로 우리는 서로의 얼음장 같은 몸을 만져댔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처음이라, 마츠모토도 나도 서로의 몸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온도가 가히 중독적이었다.
내 손이 아직 따끈한 열기가 남아 있는 걔의 허리춤을 건드리면 헉 하는 숨이 터져 나왔다. 미안, 손 차갑지. 친절한 사과와는 별개로 손은 점점 은밀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마츠모토는 그런 내 팔뚝을 쥐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차가워서 밀어내고 싶었던 것도 같고, 더 안쪽으로 잡아당기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결국 나 좋을 대로 하면서도 아직 핏기가 돌아오지 않은 퍼런 입술을 가만 두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좀 해. 아직 문앞이라고….”
“춥단 말이야.”
혹시나 얄팍한 문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기라도 할까 봐 거의 속삭이듯이 말하던 마츠모토는 결국 입술을 앙 다물었다. 키스할 수 없었으므로 걔의 다부진 턱선과 목울대를 따라 입 맞추며 내려갔다. 허리를 굽혀야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따뜻해서 결코 놓아줄 수 없었다.
마츠모토는 아직도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고집스럽게 나를 안거나 내게 기대진 않는다. 그러나 결국 좁은 이불 위에서 빈틈없이 포개진 채로 잠들 것을 알기에 나는 마음껏 그를 몰아붙였다. 겨우 현관을 벗어나 패딩 두 벌이 바닥을 뒹구는 동안 내 손은 마츠모토의 티셔츠 아래서 뒹굴었다. 바지춤이 맞닿아 뭉근하게 비비기만 해도 간지러운 쾌감이 올라왔다. 마츠모토가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그 위로 귀를 댄 채 서둘러 바지를 끌어내렸다. 마츠모토의 짙은 남색 브리프가 동그랗게 젖어 있었다. 그 위를 장난스럽게 툭 건드리니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한손으로 걔의 발목을 쥐며 킥킥 웃었다.
“야, 나 저번에 맞은 허벅지에 멍 안 빠졌어, 아직.”
“그러게 누가 맞을 짓 하래?”
“하여간. 말랐는데 힘은 좋아.”
“어. 농구도 너보다 잘해.”
“꼭 지금 그런 소릴 해야겠냐?”
타박을 놓으면서도 즐거워서 미친놈마냥 실실 웃었다. 말대꾸를 하는 마츠모토의 얼굴도 그런대로 즐거워 보였으니, 이제 분위기를 잡을 타이밍이었다.
“그럼 내가 더 잘하는 거 빨리 해야겠네.”
마츠모토는 내가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한다며 조금 큰 소리를 내 웃었다. 옆방에서 듣기엔 사이좋은 룸메이트라고 느껴질 정도로만, 그렇게.
걔는 사정할 때마다 내 이름을 불렀다. 노베, 그렇게. 끝이 가냘프게 흩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원래 사정이라는 것이 마땅히 절정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지만. 신음도 참느라 거의 음소거 시킨 것처럼 조용한 섹스를 하는 주제에 그 순간만큼은 꼭 내 이름을 부른다니. 그것도 엄청 느끼는 얼굴로….
하여튼 얌전 떨게 생긴 거랑 다르게 발랑 까졌다. 솔직히 난 걔가 그러는 게 좋았기 때문에 할 말 없지만.
가을쯤이었나. 아키타는 단풍이 빨리 드는 곳인데 예년보다 단풍이 떨어지는 속도가 빠르다고 했다. 초겨울이라고 정정해야겠다. 그쯤부터 우린 이런 사이가 됐다.
이런 사이가 뭐지? 일단 섹스를 하니까, 애인? 그러나 애인이라고 하기엔 사랑한단 낯간지러운 소리나 눈짓을 보내지 않는다. 마츠모토와 나는 친구에 더 가깝다. 다른 일학년 선발 인원 사이에 섞여 경기 얘기를 주고받는 정도. 반이 달라서 동아리 활동 시간 전까진 마주칠 일도 없다. 가끔 화장실에 갈 때나 농구부 담당 선생님의 호출로 교무실에 가야 할 때, 계단 바로 옆인 마츠모토의 반을 잠깐 지나간다. 그것뿐이다. 친구라고 하기에도 좀, 먼가?
물론 마츠모토는 여전히 나를 보면 얼굴을 붉히곤 한다. 줄곧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시선이 마주친다든가, 이따금 손등이 스치기도 했다. 아니. 경기 중엔 손등만 스치겠는가. 눈빛이 바뀌어선 온몸으로 전력을 다해 블로킹을 뚫으려 했다. 그럴수록 난 허벅지에 힘을 주고 버텼다.
그보다 나는 게이라곤 하기엔 스스로가 남자도 된다는 사실조차 최근에 알게 됐는데. 마츠모토 덕분에. 마츠모토가 게이인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우린 그런 얘길 하지 않았다. 그냥 기숙사 방 하나를 나눠 쓰며 서로의 훈련 일지를 베껴 쓰고 누구의 속옷인지 헷갈려 하거나, 가끔 섹스를 할 뿐이다. 역시 일단 친구라고 해두는 게 좋겠다. 나는 마츠모토와의 섹스가 나쁘지 않았고, 걘 어떤지 모르겠지만…. 밀어내지 않았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렇게 삼 년을 지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3. 겨울 방학
마지막 인터하이 성적이 좋진 않았지만 다행히 삼학년 선발 멤버들은 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다들 조금은 편한 마음가짐으로 윈터컵에 임할 수 있었다.
카와타나 후카츠는 이미 이학년 때부터 대학 농구를 향한 정확한 목표를 정해둔 상태였기에 선발에 남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고, 나와 이치노쿠라는 진학을 위해 윈터컵에는 출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마츠모토도 남았다. 대학 농구엔 뜻이 없지만 윈터컵에선 꼭 우승을 하고 싶다고. 후카츠는, 필기가 빼곡한 마츠모토의 교과서를 휘릭 넘겨보며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우승 한 번도 못 해본 애처럼 말한다, 뿅. 그 말에 마츠모토는 머쓱하게 웃으며 뒷목만 매만져댔다. 직접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인터하이의 패배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마저 참 마츠모토다워서 웃겼다.
진학과 윈터컵으로 목표가 갈린 탓에, 여전히 같은 기숙사를 쓰면서도 늦은 밤에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연습 경기 후엔 카와타를 따라가 근력 운동까지 함께 하다가 오는 것 같았다. 잔뜩 지친 얼굴을 보면 씻겨서 재워야겠다는 생각부터 앞서 엄한 짓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몇 번쯤…. 걔가 작게 코를 골며 깊게 잠들었을 때 조용히 기숙사 방문을 여닫고 공용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이미 쾌감의 역치가 높아져서, 참을래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입시가 한창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그 사이 날씨는 빠르게 추워졌다. 세 번째 겨울이었다.
윈터컵 결과를 뒤로하고 연말연초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마지막 방학식날 삼학년은 뿔뿔이 흩어졌다. 기숙사의 짐을 빼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아키타의 본가로 들어갔다.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체감하기론 삼년보다 긴 시간을 함께 보낸 것 같았다.
마츠모토와 함께 아키타역으로 향해 같은 기차를 타고 도쿄에서 헤어졌다. 나는 더 내려가야 했고, 마츠모토는 도쿄에 있는 집으로 바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는 굳이 환승하는 개찰구 앞까지 마츠모토를 배웅하러 나갔다.
“기차 시간 괜찮아?”
“응. 아직 좀 남았네. 너 먼저 가라.”
“그래. 졸업식날 보자.”
“어. 연락해.”
연락하라는 말에 마츠모토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우린 그날 밤 전화통화를 했다. 이불 안에서 소리를 죽이고 바지춤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수화기 너머로 상대의 숨소리를 들으며 자위하는 일이 낯설고도 즐거웠다. 걔가 만져주는 손길이 없으니 흥분은 제대로 될까 싶었는데 건강한 아래는 마츠모토가 숨을 참는 소리에도 벌떡벌떡 반응했다. 민망할 정도로.
사정 직전에 이불 밖으로 손을 뻗어 곽티슈를 아무렇게나 집어들고 다시 이불 안으로 파고들었다. 얄팍한 휴지를 두어장 급하게 뽑아 아래에 댔다. 야, 나 갈 거 같아. 사정 직전에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에 대고 고백하니, 마츠모토는 조금 높아진 신음을 터뜨렸다.
-
, 노베, 읏…!
먼저 싸버렸나 보다. 그 소리를 듣고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사정해버렸다. 후희에 젖거나 현실 자각 타임을 느낄 새도 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 마츠모토. 귀엽냐. 아마 그가 제 옆에 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면 이 말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르다 이불을 가슴팍 아래로 내려버리고 핸드폰을 확인하니 전화는 끊겨 있었다. 그땐 정말로, 크게 소리 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4. 노베의 첫사랑
졸업식 날에 맞춰 부모님, 형과 함께 산노공고를 다시 찾았다. 고작 두세달 정도 멀어져 있었던 것인데, 지난 삼년이 무색하게 너무나도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의 짧은 인사 말씀을 들은 뒤, 마츠모토와 후카츠를 데리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농구부끼리의 졸업 행사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연히 보건실 앞 복도를 지나쳤다. 그 순간 나는 일학년 때 여기서 마츠모토를 기다렸던 기억에 사로잡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후카츠가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뭐 두고 왔어, 뿅?”
그 말에 물속에서 건져낸 것처럼 다시 정신이 들어 고개를 저어보였다. 두고 올 만한 것은 없다. 이제 여기에, 두고 갈 것만 남았겠지.
후카츠와 나보다 다섯 걸음 정도 앞서 있던 마츠모토까지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때와 같은 노을은 없고, 대신 조금 열린 창문 사이로 차가운 봄바람이 불었다. 그러고 보니 마츠모토, 머리카락을 길렀구나. 삼개월 만에 꽤 자란 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짝 흐트러졌다. 마츠모토의 얼굴이 붉은가. 그건 모르겠다. 추위에 코끝이 조금 빨개진 것 말고는 오히려 하얀 것에 가까운 얼굴 같았다. 나는 기묘한 느낌에 휩싸였다.
후카츠는 나와 마츠모토를 이끌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군중 사이로 뒤섞이니 아득하게 멀어진 정신도 금세 돌아왔다. 윈터컵부터 활약을 보이고 있는 후배들 몇몇은 울음을 참는 얼굴이어서, 후카츠는 그런 그들을 놀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고. 나와 마츠모토를 비롯한 졸업 학년들 사이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감독님에게 인사까지 전한 뒤에야 우리는 운동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이미 집으로 돌아간 학생과 학부모가 꽤 있는지 아까보다 한산해진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난 형을 단번에 찾아냈다.
“형!”
눈이 마주친 덕분에 손을 흔들며 가볍게 그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형은 입학식 때와 비슷하게 긴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그가 걸어올 때마다 걸음에 맞춰 코트자락이 휘날렸다.
“우리 형. 인사 해.”
제 옆에 서 있던 친구들에게 고개를 돌려 형을 소개 시켜 주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허옇게 질린 마츠모토의 얼굴을 보기 전까진…. 나는 당황해서 그만 말을 멈춰버렸다. 자신을 소개해주길 기다리고 있던 형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동시에, 나와 마츠모토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 시선끼리 부딪치자 불꽃이 튀는 착각이 일었다.
나는 왜 마츠모토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을까?
그래. 이유모를 기묘한 기분의 정체를, 이제야 알겠다. 그건 어떠한 직감이었다. 나를 이루고 있던 세계가 사실은 아주 작은 균열을 시작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있었다고. 나는 멍청하게도 내 발밑이 꺼지고서야 무너지는 줄 알았던 거다. 블로킹이, 늦어버렸다.
“노베, 잠깐….”
찬바람을 맞아 살짝 튼 그의 입술이 머뭇거렸다. 말을 고르고 있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얘가 왜 이럴까. 하하. 노베 칸타로입니다.”
“안녕하세요, 뿅.”
“마사히로 형이에요.”
형은 스스로를 소개하며 후카츠와 짧은 악수를 나누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친구들 소개 받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없네. 그치? 그 특유의 다정한 말투가 자꾸 귓가를 간지럽히는데도 나는 형을 돌아볼 수 없었다. 먼저 시선을 피해버린 마츠모토 때문에, 잠시 그의 옆모습을 외롭게 좇다가, 뒤늦게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게. 그래도 경기 영상 봐서 누가 누군지는 대충 알잖아?”
“맞아. 특히 카와타 선수 팬입니다.”
카와타는 어딘가 뒤틀린 내 상태를 눈치 챘으면서도, 모르는 척 형에게 장단을 맞춰주었다. 나는 짧게 마른세수를 한번 하고, 아예 마츠모토를 등진 채 말했다.
“형. 어머니는?”
“아버지랑 정문 근처에 계셔. 이런, 추운데. 우리도 이만 갈까?”
형이 말하자 친구들도 헤어지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여기저기서 안부 인사가 흘러나왔다. 후카츠는 우리 본가 근처의 지역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게 돼서, 어쩌면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후카츠를 빼면 이들과는 앞으로 동창회에나 겨우 한번 만나게 될 것이다. 마츠모토도, 마찬가지겠지.
긴 인사말 대신 카와타가 먼저 우리들을 한번씩 안아주는 것으로 비언어적 인사가 오갔다. 나는 카와타와 이치노쿠라, 후카츠를 안은 뒤 형의 등허리를 받치고 정문 쪽으로 슬쩍 밀었다.
“그럼 나 먼저 가본다.”
“그래.”
“졸업 축하, 뿅.”
“연락하고.”
이치노쿠라, 후카츠, 카와타가 차례대로 대꾸할 동안 마츠모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를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마츠모토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노베!”
정문에 다다르니 어머니가 우리를 불렀다. 귀여운 색깔의 꽃으로 잔뜩 장식된 꽃다발이 품에 쏙 들어왔다. 우리는 주차장으로 향하며 졸업과 저녁 식사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글쎄. 나로선…. 마지막으로 보았던 첫사랑의 얼굴에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5.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슬프다
마츠모토는 대학에 진학한 이후로도 농구를 계속 한다고 했다. 고교 시절 마지막 윈터컵을 좋은 성적으로 마칠 때까지 진로에 관해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대학 코치의 열렬한 구애 덕에 마음을 돌렸다.
우리는 서로가 대학을 졸업한 뒤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키타만큼은 아니지만 입김이 나올 정도로는 추웠던 겨울날, 연말을 앞두고 후쿠오카의 작은 오뎅집에서. 나와 후카츠가 대학 시절 종종 오곤 했던 가게인데, 후카츠와 카와타가 후쿠오카의 프로팀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정기적으로 보는 멤버가 셋으로 늘었다. 이치노쿠라와 마츠모토는 멀리, 도쿄에서 우리를 만나러 내려왔다. 마츠모토는 올해 도쿄 팀의 벤치 멤버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카와타가 모두의 잔을 채워주느라 바쁠 동안 후카츠는 이치노쿠라에게 회사 생활은 어떻냐고 물었다. 이치노쿠라는 막 겉옷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던 참이었다. 결국 손끝이 담배갑을 열어 한 대 꺼내기에, 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일 얘기 해야 되냐? 농구 얘기나 해.”
아직 주문한 오뎅이 나오기도 전이었는데, 이치노쿠라는 담배 한 대를 깊게 빨아 당겼다. 시원하게 불이 붙었다. 후카츠는 킥킥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내 일 얘기잖아, 뿅. 우리는 후카츠를 따라 웃었다.
이치노쿠라는 내게 라이터를 돌려주지 않았다. 어쩌다보니 그는 내 금연 결심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서, 아마 일부러 돌려주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식사 내내 드문드문 담배 생각이 났지만 그럴 때마다 마츠모토의 옆얼굴을 흘긋댔다. 다행히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아마도 마츠모토가 나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형님 결혼식이 저번주였나?”
카와타가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마츠모토를 살피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어어. 저번주.”
“나는 불러 주실 줄 알았는데. 소식 듣고 서운했네.”
카와타가 장난스레 말하길래 나도 와락 웃어버렸다. 카와타가 후쿠오카 팀의 주전 선수로 뛰게 된 것을 가장 반가워 한 사람이 우리 형이었다. 나 몰래 사온 카와타의 유니폼을 들켰을 때 멋쩍은 표정을 하던 것도 기억했다.
“너 한창 시즌 중인데 어떻게 부르냐.”
“그래도, 인마. 너라도 불렀어야지.”
“축의금 보냈더라. 그거면 됐지, 뭐.”
“미키오도 저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겠지. 동생 키워봤자 개뿔도 소용없어.”
화제는 미키오의 근황으로 넘어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형의 얘기가 길게 이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미 누군가의 가슴 한켠을 후벼 파고도 남았겠지만 난, 그런 것까지 신경 써줄 여유가 없었으니까. 이번에는 담배 한 대가 정말 간절해졌다. 이치노쿠라에겐 왠지 미안했지만 편의점에라도 들러 새 담배를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라이터도 사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코트를 집어드니 아니나 다를까 이치노쿠라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나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며 후카츠를 향해 나갔다 오겠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코트 주머니에 든 지갑을 확인하며 가게 밖으로 나왔을 때,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한번 더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마츠모토가 겉옷에 팔을 끼우다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선, 그에게 말했다. 담배는 안에서 피워도 되잖아.
“편의점 잠시 가려고. 담배가 없어서.”
“아.”
바보 같은 음성을 뒤로 하고 우리는 편의점을 향해 함께 걸었다. 찬바람이 코트깃을 들추고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괜히 어깨를 움츠리고 싶지 않아서 바람을 전부 맞았다. 요령 없이. 그러면서 동시에 자책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이런 짓을 할 나이도 아닌데, 하고.
편의점에서 담배를 살 때야, 마츠모토와 같은 브랜드의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담배까지 내가 샀다. 마츠모토는 멋쩍어 하면서도 새 담배를 받아 들었다.
우리는 가게에 들어가기 전에 문 밖에 나란히 서서 담배를 한 대씩 피웠다. 어쩐지 마츠모토가 나를 흘끔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서 그것을 확인하진 못했다. 이번에도 내 착각이고, 사실은 그가 나를 본 적이 없어서 눈이 마주치지 않을까 봐 무서웠던 탓이다. 그래. 나는, 그게 무서웠다.
“코트. 잘 어울리네.”
불쑥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나는 마츠모토를 돌아보았다. 나보다 한뼘 정도 작은 마츠모토는 고교 시절과 다르게 머리카락도 기르고, 좀 더 하얘졌나. 턱이 다부져서 그런가 한눈에 봐도 잘생긴 인상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내려다보는 바람에 속눈썹이 너무 잘 보였다. 섬세하게 그려놓은 것 같은 쌍꺼풀도.
“그래? 형이 사줬는데 요즘 거의 단벌신사야. 이것만 입게 되네.”
“하하. 직장인이나 운동선수나 비슷하구나.”
“코트는 너랑 더 잘 어울리는데 말이야.”
배우처럼 잘생긴 얼굴엔 정말 코트가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마츠모토는 회색 후드집업에 패딩 차림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입고 있으니 고교 시절이 생각날 만큼 어려 보여서 제 입장이 곤란해졌다. 첫사랑이란 건 무릇 그런 거 아니겠는가. 잊히진 않지만 떠올리면 괴로운 거. 특히나 실패한 첫사랑에 관해선 말이다.
“너랑도 잘 어울려. 멋있네.”
마츠모토가 고개를 돌려 골목 어딘가를 바라보며 담배 끝을 물었다. 나는 그 생소한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츠모토가 숨을 내쉬었다. 담배 연기인지, 입김인지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그 애의 숨도, 한숨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겨울이 반가웠다. 너는 형을 떠올리고 있을까.
졸업 이후 만난 적 없던 우리는, 그 사이 서로가 모르는 모습들로 가득 차 있었다. 흡연 여부라든가, 새로운 헤어스타일이라든가. 부디 마츠모토에게도 내가 그랬길 바란다. 어렸던 시절로부터 하나도 변한 것 없이 그대로라면 부끄러울 것 같았다. 아니. 그대로인 나를 들킨다면…, 실망할 것 같았다.
“슬슬 들어갈까?”
패딩 주머니에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낸 마츠모토는 그 안에 담배꽁초를 집어넣었다. 손끝이 찬바람에 시린지 붉어져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내 꽁초를 정리하는데,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첫눈이었다.
후쿠오카에선 흔치 않은 풍경이었는데, 눈이 동그래져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마츠모토의 옆얼굴이 한폭의 그림 같았다. 나는 잠시 숨을 참았다. 그 완벽한 순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6. 점화
정신없이 엉키는 두 몸뚱이. 마츠모토를 밀치듯 밀어붙이며 키스하면, 그는 간신히 등 뒤를 더듬거려 도어록에 카드키를 갖다 댔다.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마츠모토를 품 안으로 당기며 문을 열어젖혔다. 배경은 호텔, 주인공은 우리 둘. 창밖으로 눈 오는 후쿠오카의 야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마츠모토는 그것을 돌아볼 새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