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모토 미노루는
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했다
마츠모토 미노루는 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했다. 뒤돌아보면 그랬다.
자신의 앞에 놓인 기회들의 의미를 채 다 모른 채로 선택해온 어린 시절과, 기회비용을 모두 스스로 감당할 수 있으리라 호기롭게 착각했던 젊은 시절. 그 시간들을 지나는 동안 그의 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들 중, 확신할 수 없음에도 시간에 쫓겨 골랐던 것들은 또 몇이었던가. 그럼에도 그것들은 모두 그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었으니, 그는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불확실한 것에 대해 좋은 결과를 기대한 적 없기에 실망한 적도 드물다. 나이가 들며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에 더욱 신중해졌다 한들 후회란 그에게 드문 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에 충실했고, 그렇기에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였다. 스스로에게 만족했느냐 묻는다면 자신을 한 차례 돌아본 뒤, 그 이상의 선택을 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하며 '그렇다' 답할 사람이었다. 마츠모토는.
그럼에도 정말로 후회하는 일이 단 하나도 없느냐 물으면, 이제 어엿한 사회인인 그는 애매하게 웃으며 몇 가지 단서를 흘려주곤 했다.
"고등학생 때쯤 있었긴 하네요. 그땐 저도 어렸으니까."
"지금도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닙니다. 다들 좋게 봐주시네요."
"부활동으로 농구를 했었어요."
"여자 매니저냐고요? 하하, 아닙니다. 공고라서."
"학교는 왜... 아뇨, 숨기는 건 아니고요. 산왕공고입니다."
"네, 사와키타 선수와는 한 학년 차이였어요."
"역시 키쿠치 씨는 알아보시네요. 조금 부끄럽습니다."
사와키타가 NBA에서 활약하며 그의 고교시절 일화가 재조명되어, 스포츠에 관심이 없더라도 산왕의 이름 정도는 들어본 사람들이 많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산왕을 알았다. 개중에도 연배가 있다면 그 시절의 왕조와, 한 번 꺾인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운 유명한 서사를 기억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마츠모토를 통해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억해낸 이들은 그를 대신해 나머지 이야기를 채워주곤 했다. 마츠모토는 그의 청년 시절까지 긴 자욱을 남겼던 그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 의해 각색되는 일을 말리지 않았다.
"여기가 낯설어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신경쓰였는데, 걱정할 것 없겠구만! 마츠모토 씨의 제 2의 고향일 것 아냐?"
"학교 다닐 때는 훈련을 하느라 아키타 시내에는 잘 나와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낯설지는 않네요."
"그래, 그래. 아무튼 환영하네. 마츠모토 씨 같은 인재가 여기까지 와줘서 든든하지."
환영회를 원만히 마무리한 뒤로는 순탄했다. 마츠모토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위해 본사에서 파견될 만큼 능력이 검증되어 있었고, 매사에 성실하며 공적으로 친절했다. 거기에 환영회에서 상사에 의해 각색된 인간적인 일화까지 더해지니 사내에서도 원만한 관계가 아닌 이가 없었다.
어느새 마츠모토는 본사 직원보단 토박이 취급을 받았고, 소속이 다른 이를 향해 으레 가지는 낯선 시선은 남아있지 않았다.
친근히 받아들여 주어서 고맙지만 조금은 난감할 때가 있네, 라는 생각을 하며 마츠모토는 키쿠치 씨를 그의 부인에게 건넸다.
"어머, 죄송해서 어쩌죠. 그이가 자주 이러지는 않는데..."
"괜찮습니다."
키쿠치 씨의 형제도 산왕의 농구부였다고 했다. 그것도 마츠모토가 학창시절 들어 봤던 선배들 중 하나. 그래서인지 키쿠치 씨는 마츠모토가 산왕 출신인 것을 알게 된 후로 가까이 두었고, 회식이 있을 때마다 마츠모토에게 자리를 권했다. 어쨌든 상사인 키쿠치 씨의 환대 덕분에 지사에의 적응은 순탄했지만, 키쿠치 씨의 집이 마츠모토의 집과 한 정거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이 오늘의 불운이었다.
"돌아갈 수 있으세요? 차가 끊겼을 텐데."
"열차로 한 역 차이입니다. 여기가 중간이라서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에요."
주택가 사이를 걸으며 마츠모토는 계절이 늦봄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깥을 걸어다니기엔, 오래 떠나있었던 마츠모토에게 아키타의 겨울은 혹독했을 테니까.
'제 2의 고향이라.'
환영회 날 키쿠치 씨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틀린 말은 아니다. 비록 아키타에 있었던 것은 단 3년뿐이었지만 학창시절, 그것도 고교의 3년이란 삶에서 잊기 어려운 구간 중 하나니까.
하지만 대학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져 진학한 데다 졸업하고 취업하거나 가업을 이은 녀석도 있다. 사와키타가 귀국할 때면 도쿄에서 모이곤 했으므로 졸업한 뒤로 아키타에 온 적은 없다. 계속 농구를 하는 녀석들이라면 후배들을 가르치러 들렀겠지만, 대학 2학년쯤 농구를 그만두고 학업에 전념하다가 취업의 길을 간 마츠모토는 아니었다.
낯설지도, 그렇다고 친숙하지도 않은 도시. 게다가 마츠모토에게 익숙한 것은 산왕이 있는 노시로였지 아키타시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츠모토는 아키타를 떠나던 날을 떠올렸다. 지사로 발령받고부터 매일같이 지나치게 되어, 오히려 지금은 익숙해진 아키타 역이 더없이 낯설게 느껴졌던 날. 열아홉의 마츠모토가 도망치듯 열차에 오르던 봄.
시간도 노력도 아닌 불안에 떠밀려 선택한 기억. 막연함으로 다른 것들을 무시했기 때문에, 후회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장면이다. 마츠모토는 보지 않아도 기억할 수 있는 학교의 담벼락을 떠올렸다. 체육관을 나와서 자전거 주차장으로 가는 길, 주황색 벽돌담. 졸업식 날, 그 위로 꽃잎이 잔뜩 쌓였을 때...
"미노루?"
불쑥 불린 이름에 마츠모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노베?"
두 사람은 얼떨떨한 낯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왜 여기 있어?"
"내가 할 말이야. 아키타엔 언제 왔어? 놀러 온 복장이 아닌데."
노베는 마츠모토의 정장 차림을 눈짓했다. 지금 마츠모토는 누가 보아도 퇴근 중인 직장인의 기색이었다.
"이쪽으로 잠깐 발령을 받아서. 한 6개월... 길면 1년 정도."
"뭐? 언제부터?"
"두 달 전쯤."
"왔으면 연락을 했어야지."
"근무지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지."
답하며, 마츠모토는 자신이 제법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마츠모토였다면 표면의 진실로 마음을 숨기는 행동은 비록 반절뿐이어도 거짓말이라고 여겼을 테다.
"힘들었겠네. 지금은 괜찮고?"
그리고 그런 그를 알기 때문에 노베가 곧바로 이해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사의 형제가 우리 동문이래. 그것도 농구부. 그래서인지 호의를 받고 있어서 괜찮아."
"여기 사는 나도 동문을 만난 적은 많지 않은데, 네가 운이 좋네."
"그러게."
운이 좋네 내가.
중얼거리듯 답하며, 마츠모토는 자신이 다시한번 선택을 미적미적 미루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연히 노베를 마주침으로써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지 않았다면, 다시 아키타를 떠나 본사로 돌아갈 때까지 노베에게 연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 맞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바닥에 주먹을 부딪치는 노베의 습관이 여전해서 마츠모토는 무심결에 웃을 뻔 했다.
"너 운 진짜 좋지 않냐? 다음 달에 학교에 와달라고 부탁받았는데 너도 같이 가면 되겠다."
"운 좋다고 생각하는 거 맞아?"
"좋잖아? 오랜만에."
"적응하느라 바쁘다니까."
"괜찮다며?"
"그거랑 같냐?"
왠지 대화가 이어질수록 함께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이 되어 마츠모토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왜 가는데?"
"이제 곧 초여름이니까 인터하이 준비지. 큰 일 없으면 이맘때쯤 애들 봐주러 가거든."
"우리 둘다 농구 안 하잖아?"
"나는 하는데?"
"...프로 아니잖아. 그리고 난 안 해."
"안 한다고?"
노베는 믿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마츠모토를 훑어보더니 이내 앞뒤로 서성이며 살핀다.
"정신 사납다."
"안 하는 거 맞아?"
"딱 봐도 근육 없지 않아?"
"넌 원래 말랐으니까 긴팔 입으면 티가 안 나. 그리고 우리 나이에 배 나온 아저씨가 아니면 무조건 운동을 한다는 뜻이라고."
"건강 때문에라도 운동은 하지. 안 하는 건 농구야."
"흠."
노베의 미심쩍은 눈길이 따라붙었지만 사실이었다. 여전히 농구는 좋아한다. 하지만 혼자서 연습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아키타를 떠나 대학에서의 새 동료들과 하는 농구는, 물론 분명 즐겁긴 했지만... 글쎄.
"뭐, 직접 하지 않아도 가르칠 순 있지. 대학생때까지는 농구 했잖아? 그래도 고교생과 대학생은 다르다고."
"2학년 도중에 관뒀어. 제대로 한 건 1년밖에 차이 없는걸."
"그건 그 다음 얘기고. 멘탈 얘기를 해줄 수도 있겠네."
"회사원 아저씨 말을 제대로 들을까?"
"또 모르지, 학생 때의 너같은 놈이 또 있을지. 그런 녀석이라면 들을 걸."
고등학생 마츠모토를 생각하는 듯, 노베는 웃다 말고 마츠모토의 머리를 헤집었다.
"야! 이제 빡빡이 아니라고!"
"빡빡이일 땐 언제 곱게 당해줬고?"
농구를 계속하긴 한 듯, 악력도 손의 굳은살도 여전한 노베의 손에 단정한 머리를 내맡기며 마츠모토는 양 손을 들었다.
"이딴 놈도 친구라고..."
"그래서, 간다고 만다고?"
"간다, 가."
"오오냐. 다음 달 언제가 좋은지 확인하고 알려줘라."
노베가 놓아준 머리를 정돈하며, 마츠모토는 노베의 행색을 살폈다.
"근처에 살아?"
"엉. 여기가 우리 가게. 본가에 와본 적 있지 않나?"
"없어."
"없다고? 네가?"
"확실히 없어."
"이상하네, 당연히 너는 데려왔을 줄 알았는데."
초대받은 적은 있다. 하지만 와본 적은 없었다. 마츠모토 스스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농구부 친구. 그 선을 넘어 사적인 범위까지 가까워지고 나서도 마음을 숨길 자신이.
사람들이 마츠모토의 생각을 들었다면 이제와 그게 의미가 있냐고 말했겠지만. 아니, 분명 후카츠는 그렇게 말했을 거다. 하지만 마츠모토에겐 그게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선이었다.
"그러고보니 이 시간에 차 없지 않아? 너는 집이 어딘데?"
차가 끊겼을 테니 자고 가라고 말할 기세의 노베 앞에서, 거짓말로라도 멀리 산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근처야. 세 골목 안쪽."
"그래? 너 운 진짜 좋네."
"그럴 리가."
"뭐라고?"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노베가 다시 손을 들어 머리를 쑤석였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다. 마츠모토가 스스로 운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머리 망가진다니까."
"집 근처라며, 누가 본다고? 아니면 좀 마시고 갈래? 영업 끝나서 손님 없어."
"됐어. 영업시간에 다시 올게."
"미노루 배려심 뭔데."
딱히 배려심은 아니었다. 단둘이 술잔을 기울이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오늘 방문을 모면한 뒤로 다시 들르지 않을 수 있다면 더 좋고. 하지만 어른이 된 마츠모토는 본심을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았다.
"간다. 내일도 출근해야 돼."
"그래라. 연락하고."
휘적휘적 대충 손을 흔들어준 것 치고, 노베는 마츠모토가 골목 안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리고 마츠모토는 시선을 알면서도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뒷덜미가 당기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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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씨 얼굴 보기 힘드네."
5월 하순의 주말 아침, 노베는 마츠모토를 마주하자마자 투덜거렸다.
"어떻게 그 뒤로 얼굴 한 번을 안 비춰주냐. 너한테는 술값도 밥값도 안 받는다고 했는데."
"바빴다니까. 그리고 이 형님도 밥 사먹을 돈은 벌거든?"
"왜 형님이 너야? 나지."
노베와 대화하면 늘상 이런 식이다. 마츠모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갈 때는 네가 운전해. 올 때는 내가 할게."
"안될 걸?"
"나도 도쿄에서는 차 몰았어. 걱정 안 해도 된다."
"트럭인데 괜찮겠어?"
그제야 마츠모토는 노베의 뒤에 세워져 있던 소형트럭이 노베의 것이란 걸 알았다.
"이거야? 근데 뭐가 이렇게 많이 실려 있어?"
"애들이 좀 많이 먹어야지. 가서 요리는 못 해주겠지만 도매로 싸게 들인 식자재라도 보태 주게. 이렇게 갖다줘도 일주일을 못 갈 걸."
"노베 사장님, 성공했네."
"그러게. 가끔 이렇게 해줄 만큼은 먹고살만 합디다."
하긴, 그들의 학생 시절에도 기숙사에는 항상 먹을 것이 모자랐다. 분명 삼시세끼를 넘어 다섯 끼 가까이 먹는데도 입만 열면 배고프다는 소리를 버릇처럼 하던 시기가 아니었나.
"기억난다, 미노루 푸딩 뺏어먹은 거."
"역시 그거 너였지?"
"네가 화를 잘 못 내니까, 애들이 네 거 있으면 은근히 더 손을 댔단 말이야. 다른 놈이 먹느니 그 전에 내가 먹는 게 낫지 않아?"
"...어차피 내가 못 먹는 건 똑같은데 뭔 소리야."
무심결에 긍정할 뻔 했다.
마츠모토는 노베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시늉을 하며 트럭으로 걸어갔다.
"늦겠다. 빨리 운전해."
"예~ 예~ 마님~"
시내 길을 지나 고속도로에 접어들자 길게 자란 나무들이 보인다. 산과 산 사이 좁은 틈으로 난 길은 고속도로인데도 왕복 2차선 뿐이라서 도쿄와는 확연히 다른 지역이라는 감상을 준다.
"기분 묘하긴 하네."
"뭐가."
"생각해 보면 농구부 녀석들 다 모일 때가 아니면 별로 얼굴 오래 본 적 없었잖아. 근데 너는 언제 봐도 고딩 때 같거든."
"욕이야, 그거?"
"뭐... 쫌? 아, 화내지 마세요 마님. 야야 사고 나."
"네가 안 피하면 되잖아!"
노베가 했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헤집어 놓으려는 마츠모토와 피하려는 노베의 공방이 한동안 이어졌다.
"아무튼 말야, 너는 아직도 애 같은데 나는 운전을 하고 있고. 근데 우리는 산왕에 가고 있고.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은데 또 그렇지도 않게도 느껴져서 기분 이상하다고."
"그런가."
"우리 마님은 무심하시기도 하지~"
"운전이나 해라, 돌쇠야."
"또 이렇게 보면 미노루 어른 다 됐네. 옛날엔 놀리면 허둥대는 게 귀여웠는데."
마츠모토는 답할 말을 잃었다. 농담이니까 농담으로 받아쳐야 할 텐데, 아무리 사회생활 물을 먹었다 한들 보통의 범주를 벗어난 경우의 수에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보통보다 깊이 들여놓은 사람이 보통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던지는 말에, 마츠모토의 지난 10여년분의 어른스러움은 홑겹의 포장지마냥 허술했다.
"...화났어? 미안."
"안 났어."
"내가 널 모르냐. 진짜로 미안해."
그러니까 그런, 잘 안다는 듯한 말이 조금 거슬리긴 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는 구분하지 못하겠지만 속을 긁는지 간지럽히는지 모를 그런 말들이 신경쓰여, 마츠모토는 한숨을 푹 쉬었다.
"화난 거 아니라니까. 앞이나 잘 봐. 황천길을 너랑 가고 싶진 않다."
그제야 노베는 마츠모토를 흘끔대던 시선을 돌려 표지판을 읽었다.
"보자, 앞으로 한... 20분 정도 걸리겠네. 잘 수 있으면 눈 좀 붙여."
전혀 졸리지는 않았지만 마츠모토는 눈을 감았다. 자지 않더라도 말을 섞을수록 속이 시끄러워져서 자는 척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업어가도 모르겠네."
진짜로 잠들 줄은 몰랐지만.
큰 손이 어깨를 흔들기에 눈을 떴더니 어느새 학교 체육관 옆 주차장이었다.
"벌써?"
학교로 가는 길에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그대로인지를 떠올리며 추억하는 과정이 몽땅 생략되어 얼떨떨해하는 마츠모토에게 노베는 차 키를 건넸다.
"갖고 있어. 짐 내리게 애들 불러올게."
마츠모토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체육관 안쪽으로 사라진 노베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아키타의 초여름. 해안선과 가깝지만 조금만 안쪽으로 들어가도 높은 산이 많아 눈이 많이 내리고, 위도가 높아 여름이 천천히 오고 짧게 물러가는 곳.
마츠모토는 흘끔, 옆으로 난 담벼락을 훔쳐봤다. 채 다 자라지 않아 작은 여름 잎사귀가 매달린 나무가 얇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저 나무에서 떨어진 벚꽃잎이 담벼락에 쌓였을 때가 떠오른다. 짧은 장면이었지만 영영 기억에 남아버린 졸업식 날이다.
"이어서,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이 있겠습니다."
꾸벅.
옆에 서 있던 녀석이 별안간 인사를 시작했다. 날씨가 풀리기 시작한 계절, 졸업식을 위해 학생들이 들어찬 체육관 안은 바깥과 다르게 훈기가 돌았다. 하지만 마츠모토에겐 매일같이 달리고 땀흘린 기억밖에 없는 체육관이라서인지 도무지 여기에서는 졸 것 같지 않다. 또렷한 눈으로 교장선생님을 주시하던 마츠모토는 급우가 넘어지기 전에 깨워줘야 하는지를 고민하느라 집중력을 잃었다.
긴 다리를 내밀어 조는 녀석의 발을 툭툭 건드리자 녀석이 퍼득 깬다. 멍한 듯 잠깐 주변을 둘러보던 녀석은 이내 상황을 파악한 듯 마츠모토를 향해 찡긋, 고마움을 표했다.
놓쳐버린 교장선생님의 긴긴 훈화를 따라잡는 대신, 마츠모토는 체육관 안을 휘 둘러봤다. 평균키를 웃도는 마츠모토의 시야에 드문드문 위로 튀어나온 농구부 녀석들이 눈에 띈다. 개중에도 줄의 옆으로 비죽 나와있는 카와타 녀석과 대체 왜 중간쯤에 서서 뒷 사람 시야를 막는지 모를 노베 녀석은 찾지 않아도 보였다.
'그 키로 졸면 다 보인다고.'
그럴 거면 뒷줄에라도 서든가. 그만 커도 될 텐데, 얼마전 기어이 2미터에 도달하고야 만 녀석이 왜 저기 있는지를 생각하며 마츠모토는 노베의 뒷통수를 한참 쳐다봤다.
윈터컵이 끝난 지 두 달여, 남은 부 활동이 은퇴밖에 없는 부원들은 더이상 머리를 짧게 깎을 필요가 없었다. 신이 나서 기르는 녀석들도 있고 관성처럼 계속 밀고 있는 녀석들도 있다. 손질도 안 하고 잡초마냥 더벅하게 내버려둔 건 장발의 꿈을 가진 후카츠였고, 습관대로 밀어버리고는 기르려 했는데 깜빡했다며 한탄하는 건 저 바보 같은 노베였다.
바보짓 이후로는 나름대로 노력했는지 평소보단 조금 더 비죽비죽해진 뒷머리가 보인다. 1학년 입부식 날 분명 깎기 전의 머리를 봤겠지만 기억은 나지 않았다. 그 땐 많고 많은 농구부원들 중 '키가 큰 녀석' 정도의 감상이었으니까. 그 멀대의 머리카락 모양이 어땠는지보다 그 녀석이 큰 키만큼 리바운드를 잘 잡을지가 궁금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 멀대가 신경쓰였는지 잘 모르겠다. 친하니까 녀석을 잘 알고 녀석도 마츠모토를 익히 안다. 그런데 농구부를 벗어나면, 이 학교를 떠나면 어떻게 될지는 자신할 수 없었다.
3년 동안 같이 지내며 몸 부딪치고 가까워진 녀석들은 수두룩한데 왜 하필 저런 장승 같은 놈이었는지. 그 수두룩한 놈들과는 졸업하고 연락이 닿으면 닿는 대로 끊어지면 끊어지는 대로가 인연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저 녀석과 어떻게 될지는 왜 그리 신경쓰이는지.
분명, 좋아한다 해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멀어지게 된다고 생각하니 어째서 초조한지.
한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졸던 녀석이 퍼뜩 깨는 것이 보인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담임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는지 찔끔하는 시늉을 하며 비식비식 웃는다. 분명, 하나도 무섭지 않으면서 수더분한 성격 때문에 겁먹은 척만 하는 거다. 뻔히 알지만, 그 큰 덩치를 오그라뜨려 눈치를 보다가 도로 펴는 꼴이 웃겨서 웃음이 샜다.
잠이 깨고 나니 지루했는지 주변을 둘러보던 노베가 등 뒤까지 고개를 돌리자 마츠모토는 다급히 교장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눈을 옮겼다. 바짝 긴장한 것을 티내지 않으려 눈을 부릅뜬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마츠모토의 주의를 끌어 보려는 듯 어깨를 움찔거리고 손을 흔들어보려던 노베의 시선이 떨어지고서야 당기는 뒷덜미를 주물러 펼 수 있었다.
흘끗 살피니 결국 노베의 담임선생님이 다가와 주의를 준 모양이었다. 지루한 교장선생님의 말씀보다 널찍한 등짝을 두들기는 소리가 더 재밌는지 노베 주변의 녀석들은 몇 초 전까지 졸음 묻었던 눈을 빛내고 구경 중이다.
그리고 그 속에 같은 반 여학우들도 꽤나 섞여있는 것이 마츠모토의 속을 복잡하게 했다.
노베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성이 많았다. 오히려 덩치가 크니까 조심하는 것에 가까웠다. 위압적인 첫인상과 달리 서글서글한 성격과 섬세한 배려는 또래 여학우들에게 제법 인기가 많았다.
'지금도.'
곁에서 키득거리다가 노베와 눈이 마주치자 우물쭈물 고개를 숙이는 여학우의 귀끝이 붉다. 마츠모토에게도 낯익은 얼굴이다. 노베와 같은 반의 학생으로, 부활동은 생활문화부라고 했다. 노베의 더플백에 걸려 있는 펠트 인형을 선물해준 사람이다.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을 어떻게 거절하냐며 성의가 있으니 달고 다니겠다는 노베의 말에, 놀리려던 다른 부원들도 딱히 반박하지 못했었다. 여자애한테 받은 선물이라고 으스대는 기색 없이, 녀석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인형은 아직도 노베의 가방에 매달려 있다. 바로 어제, 졸업식을 앞두고 농구부 락커에서 물건을 정리할 때도 달려있는 걸 봤었으니까. 저 녀석은 언제까지 저걸 달고 다닐까. 낡아서 떨어질 때까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손수 만든 인형을 새로 선물해줄 때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속이 더부룩해졌다. 졸업하고 나서까지 그 인형의 행방을 신경쓰는 자신이 한심하다. 하지만 그보다 싫은 것은 그 인형이 어떻게 되든 마츠모토는 알 수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손수 만든 성의를 봐서 가방에 인형을 매달아주는 노베 녀석의 무던함이 좋지만 싫다. 하지만 사실은 단지 인형이 싫은 것이 아닌 것을 알았다.
한동안은 더 가방에 달려있을 저 인형만큼의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스스로가 싫다. 마츠모토는 녀석의 고교시절에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겠지만 그건 마츠모토 뿐 아니라 농구부의 부원들은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졸업하면 그뿐, 코트를 떠나면 추억의 페이지 속에 갇혀 빛바래 갈 사이.
손끝이 약간 얼었다.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고 생각했다. 먼 미래에 만났을 때 웃으며 어깨를 두드릴 정도는 되고 싶다고. 끝모를 초조함이 들 때마다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해 되뇌인 말들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고도 새삼스럽게 회의감이 든다. 꽃이 떨어지는 날씨 때문일지도, 문득 노베의 가방에 걸린 인형이 신경쓰여서일지도, 오늘이 어쩌면 마지막이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녀석이 좋다. 그걸 숨기는 게 힘들다.
갑자기 결심이 솟아올라 마츠모토를 충동질한다. 계획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싫어한다. 자신이 노력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숨기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도망가는 것이라도 좋지 않을까? 어차피 오늘이 마지막인 거라면.
눈을 몇 번 깜빡이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식이 끝나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마츠모토가 잠든 줄 알았는지, 등 뒤에서 누군가가 네가 졸 때도 다 있네, 하며 어깨를 두드린다. 함께 졸업하는 학우들 사이에 뒤섞여 뒤늦게 체육관을 나서다, 문득 뒤돌아봤다.
성실하고, 진실되고, 조화롭게.
중앙 현판에 걸린 저 문구를 때로는 마음 속에서 따라 읽었고, 그보다는 익숙하게 스쳐지나간 적도 많았다. 언제나 있었기 때문에 시선을 주지 않았지만 종종 스스로를 돌아보며 지키고 있던가 생각했었다.
성실했던가. 서툴어서 틀렸을지는 몰라도 그랬다. 진실했었나. 그랬지만 한 가지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니 마지막에라도 바로잡자. 조화로웠나. 지금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니 지금부터 이 잔잔한 곳에 돌을 던져 일어날 소란도 참작해 주면 안 되는지.
긴장감에 아무렇게나 흐르는 생각을 내버려둔 채 마츠모토는 강당을 나섰다. 잠깐 사이 학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체육관 앞은 조용했다. 조용하지 않았더라도 담벼락 앞에 멀대처럼 큰 키로 서 있는 노베를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 같다. 키가 크지 않아도 알아봤을 거라는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반대로,
"노베 군이 좋아. 사, 사귀어 주세요!"
녀석이 아닌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이후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리고 눌러 덮어 놓았던 곳에서 샘솟던 용기가 어떻게 깨어지고 사그라들었는지도. 그저 정신없이 교실로 돌아가 졸업식을 마무리하고, 학교 일정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열차에 올랐다. 기억에 남은 것은 꽃잎 덮인 담벼락과, 문득 정신이 들어 올려다봤던 아키타 역 정도.
"연습이 아직 안 끝났더라."
혼자서 터벅터벅 돌아나온 노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에 분위기 안 좋아, 누가 사고를 친 건지 뭔지. 정렬해서 혼나는 것 같길래 손을 빌려올 수가 없던데."
노베는 운전석 문에 끼워둔 물병을 들어 마시고는 마츠모토에게 내밀며 눈짓했다.
"나는 됐어."
"잠깐 시간 때울 겸 걸을까. 자느라 오는 길 못 봤지? 별로 바뀐 건 없고 그대로지만."
차 문을 잠그지도 않고 앞서 걷는다. 창문도 열어둔 채로다. 누가 훔쳐갈 것도 없고 훔쳐갈 사람도 없겠지만 그와 별개로 이 장소에 대해 가지는 편안함이다.
방향 없이 걷던 노베가 담벼락 앞에 서서 나무를 올려다본다. 꽃잎은 이미 다 진 벚꽃나무다. 새잎이 돋은 지도 한참이어서 빨갛게 익은 꽃대와 푸른 나뭇잎이 뒤섞여 있다. 꽃대까지 다 떨어질 시기를 가늠하는 듯 노베는 잎의 크기를 살폈다.
"곧 현 예선 끝나면 여름이겠네."
그렇게 얼기설기 덮어둔 해의 여름이 어땠더라.
마츠모토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농구는 고교까지만이라고 정했었다. 그런데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던 학교에 수험을 치렀다. 일반 학생으로 입학해 농구부에 입부신청서를 냈을 때는 물론 환영받았지만, 사실 마츠모토가 원래 지망했던 농구부 없는 학교보다는 편차치가 조금 낮은 곳이었다.
결국 농구를 그만뒀으니 그 학교를 간 것이 아깝지 않았느냐고, 친척에게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마츠모토는 대학 시절까지 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테니 괜찮다고 답했다. 친척은 그게 마츠모토가 생각하던 미래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해 주었지만, 사실은 산왕이 아닌 곳에서의 농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농구를 계속한다면 지금 산왕에서 함께 뛰는 다른 녀석들과 언젠간 다시 지금처럼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녀석들이 아닌 사람들과의 농구를 하면 그런 게 상관없어질까도 궁금했다. 그 답을 알 수 없어서 마츠모토는 농구를 계속해야겠다고 결정했었다. 그게 그의 노력이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그래. 지나간 것은 보내주자는 것이었다. 산왕과의 시간은 끝났다. 그게 아무리 아쉽고 아까워도 어쩔 수 없다. 소중한 시간이 끝났고 그게 이렇게나 무거워질 줄은 미처 몰랐다 해도, 소중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니 괜찮았다.
돌아오지 않을 3년이었다.
마츠모토는 기억 속에서와 같은 자리, 담벼락의 한켠에서 나무를 올려다보는 노베를 봤다. 쌓여 있던 꽃잎의 자리는 푸른 잎이 대신하고 있다.
아직도 답을 알 수 없어서 덮어만 두었던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언제나 저 녀석이 문제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막연히 살다 보면 떠오르겠지, 했다. 언젠가는 스스로와 저 녀석에게 물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물어야 할 때가 왔을 때 피하지 않겠다는 다짐도 많이 했다. 그런데 여태껏 질문조차 찾지 못한 것을 보면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담벼락 앞에 선 노베의 머리는 적당히 짧아 편해 보였다. 저 뒷통수로는 박박 깎은 머리를 오래 보았고 비죽비죽 싹난 모양의 머리를 오래 기억했다.
그러니까 마츠모토는 어째서 이 마음에 답이 떨어지지 않는지를 몰랐다.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 나아갈지, 멈춰설지. 어떻게 되어갈지. 손댈 수 없어서 노력도 하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두고만 봤던
끝나지 않은 첫사랑이 있었다.
"노베."
"엉?"
"할 말 있는데."
마츠모토는 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라 생각했다.
십수 년 전 고르지 못한 선택지를 다시금 고를 수 있는 기회를 받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먼 시간을 걸어왔어도 같은 태도로 이야기를 들어 줄 녀석을 상대로 둔다는 것도 천운에 가까웠다. 먼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곁에 머물렀던 많은 소중한 것들이 있었다. 그러니 이보다 운이 좋지 못하다고 해도 괜찮았다.
지금의 고백 이상의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